우리는 어떻게 예수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19:31~42[200주년 신약성서]
19:31 (그 날은) 준비일이었고 그 (이튿날) 안식일은 큰 날이었으므로 안식일에 시체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그 다리들을 꺾어서 치워 달라고 요청하였다.
19:32 그래서 군인들이 와서 첫째 사람의 다리를 꺾고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다른 사람의 다리도 꺾었다.
19:33 예수께 와서는 그분이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는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않고
19:34 군인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
19:35 본 사람이 증언한 것이니 그의 증언은 참되다. 또한 그는 여러분도 믿게 하려고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19:36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그의 뼈가 상하지 않으리라"고 한 성경(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로마의 잔혹한 사형 방식이었던 십자가형은 크게 세 가지의 효과를 노립니다. 하나는, 유사한 죄를 범할 시에 위 같은 처벌을 받는다고 공표하여 대중에게 두려움을 자아내서, 로마의 법을 순순히 따르도록 억압하는 장치 역할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매달린 자의 고통에 관한 효과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몸의 구조상 호흡하려면 무릎과 하체의 힘을 이용해서 상체를 위로 밀어낼 때, 횡격막이 열어져 숨을 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팔과 다리에 못이 박혀서 지탱해주는 힘을 받으려고 할수록, 극심한 고통에 계속 노출되어 매달린 자체만으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문받는 효과를 줍니다.
마지막으로, 심리적인 효과입니다. 주변 가족과 본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어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반로마적인 행위에 대해 후회하도록 만들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기 전까지 살고 싶거나 살리는 방안을 찾게 만들도록 하여 철저히 굴종적인 태도로 훈육 당하는 효과입니다.
(개인적으로, 기원전 6세기의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했다던 팔라리스 황소보다 십자가형이 더 잔혹한 것 같습니다. 팔라리스 황소는 놋으로 만든 황소 통 안에 사람을 넣고 불을 지펴서 냄비처럼 서서히 사람을 익히는 사형 도구인데, 그 안의 비명이 소의 울음소리처럼 들리도록 음관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물론, 팔라리스 황소도 무척이나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통 안에 들어가 세상과 단절된 채 육체적인 고통만 겪으면 되지만, 십자가형은 고통당하는 당사자가 살았던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한 채 서서히 죽어야 하므로 심적인 괴로움을 여러모로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형은 서서히 죽어가는 그 특성 때문에 어떤 경우는 7~8일을 목숨이 끊어지지 않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 구절에 표현대로 ‘다리를 꺾었다.’라고 했는데, 이는 쇠뭉치로 무릎뼈를 산산조각 내버려서 호흡을 차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던 예수님을 포함한 당시 세 명이 안식일 다음 날까지 살아있을 것 같아서, 흉측한 십자가가 거룩한 안식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다리를 꺾어서 빠른 시내에 처형되어 치울 수 있도록 요청했던 것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두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사실, 이 장면은 무척이나 잔인합니다. 최후까지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무릎을 여러 차례 쇠뭉치로 후려치면서 생사를 확인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정육점에 돼지와 소의 몸이 도륙되는 것처럼, 사람의 뼈와 살이 예리하고 두툼한 칼로 썰려 나간다는 전제의 상상만큼이나 끔찍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이미 숨을 거두어서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 34편에 적힌 예언의 성취입니다.
19절,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20절,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도망치다가, 아기스 왕에게서도 신변을 위협받아 침을 질질 흘리고 미친 척을 하면서 빠져나왔습니다. 34편은 다윗의 불안하고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의로운 자로 살아가면 분명히 구원하신다고 확신하며 쓴 시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처형 도구에 걸린 예수님을 의로운 자로 증명해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부러지지 않는 뼈는 인간이 만든 심판의 도구, 십자가를 부러트리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공포의 도구로 사용했던 십자가는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7절,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시오" 하셨다. 그래서 그 시간부터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또한 심리적인 고통에 사로잡혀야 마땅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또렷한 정신으로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사는 공동체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심리적인 고통도 예수님의 정신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나중에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졌는데, 십자가에서 다리가 꺾였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다리가 꺾이지 않으신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 처형을 마다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도의 소명을 다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앙은 몸의 뼈 같은 정신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뼈는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하고, 형태를 갖게 만드는 기본 골조입니다. 뼈 없이 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뼈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좌절될 수 없는 이유는 꺾이지 않은 주님의 의로우심, 꺾을 수 없는 주님의 정신과 사랑이 그것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잔혹하고 끔찍했던 예수님의 수난이 신앙의 양식이 되어 제 오장육부로 들어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저의 신앙이 성숙으로 나아가는 줄 믿으며, 주님께서 꺾이지 않은 신앙으로 저를 인도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