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 주님의 세상

디즈니+ 드라마『조명 가게』로 읽는 예수

by 노에시스
요한복음 8:12~20
8:1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비록 내가 나에 대해 증언한다 해도 내 증언은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다.




드라마화된 강풀 작가의 작품 『조명 가게』의 빛에 관한 설정이 기억납니다.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자들은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조명 가게에서 자신의 빛을 내는 전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왜 꼭 조명 가게이고, 자기만의 전구를 찾아야 하는지, 충분한 설명과 답을 명확히 제시해 주지 않는 부분은 삶의 차가운 생살과 마주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들 중 자기 전구를 바닥에 내던져 깨부순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숨이 아예 끊어져 저승에 남을 수밖에 없는 애인 때문에 그녀는 이승으로 돌아가길 포기했습니다. 함께 저승에 머물길 결정 내린 것입니다. 겉보기에 그녀가 빛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사랑하는 이가 그녀에게 진정한 자기의 전구고 빛이었습니다. 그녀는 감각으로 인지되는 기계적인 빛을 거부하고, 자신 안에 살아 숨 쉬는 빛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생명은 빛을 쫓아 살아갑니다. 베란다에 놓인 식물의 휜 허리에는 빛을 갈망한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표면이 뜨겁게 데워진 전등에 자꾸만 몸을 던지는 나방을 보고 있으면 애잔한 감정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사람도 자기 빛을 찾아 이리저리 변형되고 깨지고 찢기며 헤매고 있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빛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거부하던 유대인에게 매우 충격적인 입니다. 인간이 방황하고 좌절하는 삶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 구속에서의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경청하던 모든 유대인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그러니까 삶의 모든 열정을 쏟아야 할 참된 방향에 대해 경청하고 깨달았다면 요한복음은 8장에서 끝맺음을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대면하기를 거부하고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또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을 포기하기 어려워합니다.


15절 “너희는 사람의 기준대로 판단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다.”


이 말씀 앞에서 저는 이전에 은밀히 품었던 불신앙을 실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나은 내일과 세상을 위해 자기 비평과 구조적 모순에 대해 성찰하는 건 매우 중요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하면 독이 되듯, 한때 저는 신랄한 비난과 조롱 자체에 매몰되었던 회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거지 같은 세상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제가 마주한 세계는 무척 좁았음에도, 망하게 될 거란 예측이 그 무엇보다 확고한 믿음이 되어 저를 불신앙으로 매료시켰습니다. 세계의 소망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매 순간, 이 세계를 선하신 뜻대로 이끌어가신다는 사실을 거부하였습니다.


제 생각과 욕망은 생각보다 꽤 그럴싸한 세계를 지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생애를 걸고 우주의 다양한 활동과 법칙을 치열하게 연구하는데 그 결과 값이 뒤바뀌기도 하지만, 저의 부풀어진 내면세계 안에서는 우주 원리 따위는 손가락 개수 세는 일보다 쉽고 명확해져서 짜릿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은 순종이 아니라 비평의 재료가 되었고, 제 손에 좌우지 될 수 있는 연약한 일처럼 다가왔습니다. 제게 반기를 든 것 같은 생각과 의견은 혐오의 굴로 처넣었습니다.


겉으로 보아선 남들은 모를 테지만, 저의 교만했던 내면을 현미경으로 세밀히 비추면 아마 이런 내용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교만의 늪에 빠지면 혼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여전히 지금도 저는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버둥거리며 주님의 능력을 구하고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설정하여 부풀려진 세계에는 자기 욕망 때문에 위선과 거짓이 쉽게 일어나고 가치가 왜곡됩니다. 그래야만 만족과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이룬 주님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본래 뜻에 순응하셨고, 결과가 어떠하더라도 그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이것이 자기혐오로 자신의 증언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유대인들의 세계와 하나님의 참된 뜻 안에서 일치를 이루신 주님이 걸어가신 세계의 대결 구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체의 증언도 참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세상에 불완전하고, 흠이 있어서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사유하고 있습니다. 때론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혐오했던 것들이기도 하고, 거기에는 저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날마다 새롭게 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정 속에서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뜻이 저의 불완전한 여러 고민과 회의로 차오르는 삶의 순간에도 결국에 선하신 뜻대로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