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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Oct 14. 2024

어떻게 살 것인가

에필로그

마르셀 프루스트는 여행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다.' 우주의 탄생에서 나를 이루는 원자에게 이르는 긴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관찰자이고, 세상은 내 관찰의 대상이다.

이 두 존재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세상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고, 동시에 세상의 존재 방식이 나의 관찰 방식을 규정한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내가 없다면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고, 세상이 없다면 나는 관찰자로서의 존재를 잃는다. 마치 우주가 관찰자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나 또한 우주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인류원리'를 통해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주의 존재 이유는 관찰자라는 나의 존재로 설명될 수 있다. 나와 세상은 결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둘은 긴밀하게 얽혀 하나처럼 움직인다.


이러한 사고는 현대 과학의 결과물만이 아니다. 고대 인도 철학에서도 비슷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베다 철학의 정수인 <우파니샤드>는 '범아일여', 즉 '세상과 나는 하나다'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우파니샤드>는 세상과 나를 구분하지 않으며,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말한다. 나(아트만)와 세상(브라흐만)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이분법적 사고가 사라진 상태에 도달할 때 우리는 완전한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는 <우파니샤드>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상을 현대적인 삶에 맞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범아일여를 이루기 위해 탈속적 수행을 요구했던 고대 인도의 방식을 현대인에게 제안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신 우리는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세상은 내가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달라지며, 내가 받아들이는 방식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보는 대로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믿는 대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토끼와 오리가 모두 보이는 그림을 선보였다. 이 그림을 보고 누군가는 토끼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오리를 떠올린다. 분명 동일한 그림인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다른 그림을 말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일이다. 오히려 동일하게 인지하는 것이 더 드물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오차를 지니고 있으며, 감각기관을 거쳐 뇌로 전달된 정보는 관찰자의 경험에 의해 또 한 번 왜곡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감각기관과 사고방식이라는 필터를 거쳐 우리에게 인지된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구조와 특징이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난다. 색맹이 보는 꽃밭은 정상인이 보는 꽃밭과 색이 다를 것이다. 시력이나 청력의 차이도 미세한 오차를 만든다. 이 처럼 감각기관을 거치는 과정에서 세상은 한 번 왜곡된다. 그 후 정보는 사고방식을 거치며 한 번 더 왜곡된다. 물이 절반 정도 차있는 컵을 보고 누군가는 '물이 반이나 차있네'라고 받아들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물이 반 밖에 없네'라고 받아들인다. 이렇듯 세상은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과 경험을 통해 구성되고 정의된다.


사고방식이 관찰에 영향을 주는 사례는 많다. 일례로 같은 구름을 보고 다른 모양을 떠올리는 이유는 사고방식이 관찰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보고 관찰이 이론의존적인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관찰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관찰은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이나 경험에 견주어 사물을 인지한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대로 실험을 관찰하는 확증 편향은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감각기관과 사고방식을 거치며 세상은 우리에게 인지된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지만 다르게 인지하는 이유는 감각기관과 사고방식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찰자마다 인지하는 세상의 모습이 다른 것이다. 나의 사고방식이 세상을 결정하는 데 주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어떻게 살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작이다.


우리는 모두 관찰자이며 따라서 우리의 삶은 철저히 1인칭 시점에 갇혀 있다. 내가 겪는 일들을 한 발짝 물러서서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볼 때 우리는 사건과 인물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벌어지는 일에서는 사건만 보일 뿐, 그 사건 속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내가 마주하는 현재의 상황이 불편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의 인생이 내 것보다 더 빛나 보이는 이유도, 지난 추억이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낭만적으로 기억되는 이유도 1인칭 시점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여행 중에는 감흥을 덜 느끼다가도, 돌아와서 찍어둔 사진을 볼 때 더 깊은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3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펠탑을 제대로 보려면 에펠탑 밖으로 나와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제3자처럼 바라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부른다. 메타인지가 발달한 사람은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타인의 연애 상담은 잘해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연애에서는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이는 메타인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조언하듯 스스로를 바라보며 행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도 메타인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불리지만, 그 실패가 자아성찰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을 뿐이다. 자아성찰을 통해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교훈을 얻을 때 비로소 실패는 성공의 자양분이 된다. 메타인지를 키우면 현재 자신의 삶을 더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데서 온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자아성찰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자아성찰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법칙을 깨닫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 비로소 불필요한 갈등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방구에서 볼펜을 훔쳤을 때 밤새 불안함을 느끼고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그 행동이 나의 도덕적 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정한 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불편함과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유는 자기 스스로의 법칙을 세우는 의지의 자율성이다."


칸트의 말에 따르면, 자유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도덕적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자연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 속에 망설임이 없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자연의 자유와 닮아 있다. 자신에게 맞는 법칙을 찾고 그것을 따르는 삶이 바로 진정한 자유를 향한 길이다. 자연이 물리 법칙에 따라 자유롭게 흘러가듯이 말이다. 결국, 우리는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을 제3자처럼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고, 자아성찰을 통해 자신이 정한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법칙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마침내 내면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칙을 자발적으로 따르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을 초월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내면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성찰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진정한 나를 만나고,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성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일기를 쓰며 하루의 일과를 되돌아보거나, 속상하거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니체나 칸트 같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아성찰은 단순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구분하는 차원이 아니다. 더 근원적인 탐구를 요구한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넘어서 나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즉, 말과 행동의 원인이 되는 인과관계의 시작점을 탐구해야 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다. 말과 행동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이다. 우리는 상대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일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말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원인에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따라 행동하며, 그 가치에 에너지를 쏟는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항상 부지런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시간은 귀하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치관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이끄는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될까? 가치관은 타고난 기질과 성장하면서 겪은 경험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된다. 기질과 경험이 어우러져 '신념'을 만든다. 신념이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 또는 틀릴 리 없다고 여기는 사실을 말한다. 신념은 사람마다 다르다. 객관적으로 입증된 내용도 아니다. 신념은 개개인이 갖는 고유한 믿음 체계다. 사실 관계는 신념과 관련이 없다.


신념은 나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예를 들어, 부지런한 행동은 '시간은 귀하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되며, '시간은 귀하다'는 가치관은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신념에서 나온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모든 가치관은 어떠한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념에는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신념과 개인적인 신념이 있다.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신념에는 직관이나 물리법칙 같은 것이 있다. '시간은 흐른다', '인간은 죽는다'처럼 당연한 사실도 일종의 신념으로 우리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다. 물론 같은 신념을 지녔다고 같은 가치관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죽는다'라는 신념은 해석하기에 따라 '유한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삶은 무상하기에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신념이 삶의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신념에는 신앙, 역사적 사실, 민족적 정체성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거나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다' 같은 믿음은 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우리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경험으로 터득하는 개인적인 신념도 있다. '선행은 되돌아온다', '계속 잘해주면 사람들이 우습게 본다'와 같은 신념은 각자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살아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신념도 다르다. 자기 계발서의 내용이 저자마다 다른 이유도 저자마다 신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적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경험은 신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살아온 배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드러나는 그의 말과 행동은 과거 그가 살아온 인생에서 형성된 신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성찰이란 이러한 자신의 신념 체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인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치관과 언행을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자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유한 신념을 가지게 된다. 내가 모르는 신념이 때로는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자아성찰은 자신에 대한 무지를 하나씩 벗겨나가는 과정이다.


신념의 총합이 곧 나 자신이다.


나아가 자아성찰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변화하고 싶은 행동이 있다면, 먼저 그 행동의 기저에 깔린 신념을 변화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아무리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해도,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깔려 있다면 결코 공부에 열중할 수 없다. 반대로, '공부하면 성적이 오른다', '공부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신념을 가진다면 공부에 매진할 수 있다.


자기 계발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에서도 "모든 발전은 내면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동기부여는 변화의 시작이며, 이는 믿음의 변화나 새로운 신념의 형성에서 비롯된다. 목표가 나에게 꼭 필요하다는 믿음과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변화할 수 있다. 자아성찰은 이러한 신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높은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높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높은 곳에 서면 더 멀리 볼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높은 사람은 멀리 보는 사람, 즉 나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에도 마음을 쓰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낮은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시야가 좁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사람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가까운 지인에게 관심을 두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다음 단계의 사람은 자신과 모르는 사이라도 같은 국민이나 같은 민족이라면 동질감을 느끼고, 국가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두 팔 걷어붙이고 돕는 사람이다.


더 높은 사람은 국경을 뛰어넘어 인류애를 가진 사람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지진이 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이 겪은 비극에 함께 슬퍼하는 사람이다.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은 인류를 넘어 모든 생명체를 소중히 여긴다. 길가의 작은 풀 한 포기조차 함부로 여기지 않고, 작은 개미도 가볍게 죽이지 않는 사람이다. 한층 더 성숙한 사람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온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다.


결국, 높은 사람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만물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돈과 권력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좁아지게 만들 때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가진 것이 많더라도 주변을 살피는 이들보다 더 낮은 사람일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내가 보는 대로 세상이 존재한다”는 말은 높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높은 사람은 단지 자신을 넘어서서, 더 멀리 있는 세상과 더 멀리 있는 존재에게도 마음을 두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들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큰 마음으로 이해하며,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선다.


'나는 무엇인가?' '세상이 무엇인가?' '나와 세상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이런 질문들이 실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철학적 사색 대신 더 실질적인 것, 예를 들어 공부를 더 하거나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추상적인 사유로 그치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이어진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만큼 현실적이고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사색에 잠긴 이들을 보며 답답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민 속에서 삶의 답을 찾은 사람은 방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히 하고 그 길을 향해 정진할 수 있다. 늦게 출발했다고 해서 반드시 늦게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출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내면 깊은 곳에서 출발선에 서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과학적 탐구와 철학적 고찰을 통해 내가 찾은 답은 간단하다.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내린 선택과 결정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든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힌두교이든 혹은 과학이든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따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무런 고민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면, 삶의 길에서 쉽게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아성찰이 이루어진다. 자아를 들여다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직접 개척하는 일이다.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행동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주체적인 삶이다.


자신을 정의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선택하며,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선택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오직 각자의 몫이다. 주체적으로 사는 것, 그것이 곧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다.


자연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인생의 주인이 되어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삶. 자신의 우주를 개척하고 결정하는 삶. 나 자신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이자 축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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