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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Oct 14. 2024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천동설과 지동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세상에 꺼내며 스스로 이렇게 평가했다. 순수이성비판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칸트는 관념론을 발표하며 경험론과 합리론이 몇 백 년간 치열하게 논쟁하던 '앎이란 어디서 오는가'란 질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고의 패더라임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향하던 시각을 우리 내부로 돌렸다.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릴만하다. 우리는 이처럼 대전환을 일으키는 사고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가 무슨 일을 했길래 이런 말이 생겨났을까?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과학을 접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이론을 바라봐선 안 된다. 많은 것이 밝혀지고 그것을 학습한 상태로 과거 이론을 바라보면 유치하고 때로는 바보 같은 말이라고 생각이 든다. 만물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요즘 유치원생도 다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세상이 원자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 바보천치 취급을 받았다. 지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 당시에는 혁신적이고 바보스럽고 엉뚱한 주장에 불과했을 수 있다.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당시 과학자의 시점으로 이론을 바라보아야 과학의 신비로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과학을 탐험할 때 지켜야 할 몇 안 되는 규칙이다.


기원전으로 떠나보자. 흰 천을 두르고 머리가 조금 벗겨진 노인들이 밤하늘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중얼중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몰래 이야기를 엿들어 보니, 한 노인이 말한다. "이제 씨를 뿌릴 때가 됐군." 그러자 옆에 있던 노인이 말한다. "올해는 아무래도 흉흉할 것 같아..." 우주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탐구 대상이었다. 달력이 없던 시절 밤하늘은 시간을 보여줬고, 때로는 운세를 점치는 점성술로 이어졌다.


우주에 대한 관심은 고대부터 존재했고, 가장 큰 관심사는 태양과 지구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태양이 동심원 궤도로 지구를 공전한다고 생각했다. 2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원 모델에 주전원을 추가하며 기존 모델의 오류를 보완하고, 천동설을 더 공고히 하였다. 아무도 천동설을 의심하지 않았다. 천동설에 반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 후로 1400년이 지난 후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태양과 지구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과학적 관측에 기반을 둔 주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바꾸니 천동설이 가지고 있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망원경의 발달로 더 멀리 있는 행성을 관찰할 수 있었고 지동설의 근거를 하나씩 찾아냈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이론을 발표할 때 관측이나 논리보다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도 신의 뜻에 거스르는 내용이 있어서는 안 됐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16세기는 지금과 사회적 분위기가 달랐다. 과학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시대로 모든 것이 신으로 해결되던 시기다. 자연은 신의 창조물이고 신이 부여한 질서대로 움직인다고 믿었다. 당시 가장 큰 범죄는 종교반역이었고 누구도 감히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었고, 자연스럽게 교황은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교황이 살고 있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신에 대한 모독이었고 교황청은 지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을 불러 종교재판을 열기도 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는 화형을 피하기 위해 지동설을 부정한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갈릴레는 교황청을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후 지동설은 케플러와 뉴턴을 거쳐 명백한 사실로 자리매김했다. 사회의 통념을 바꾸려는 시도는 무모하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현대 사회는 기존 이론에 반하는 이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더불어 자신이 지금껏 잘못 알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도 필요하다.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꾼 변화는 사회적 통념을 뒤엎은 대전환이다. 2000년 넘게 유지되던 우주관을 완전히 바꿔놨다. 이런 대전환을 이끈 시발점은 '의심'이다. 이전까지 아무도 천동설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류가 발견되더라도 관측이 잘 못 됐을 것이라고 여기거나, 이론을 조금 손보는 것으로 끝났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실이 틀릴 수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천동설은 오류투성이였다. 이론의 생존을 위해 구멍이 날 때면 그때그때 바느질을 하며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몰랐다.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당연한 것을 의심하는 태도는 세기의 천재들에게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뉴턴은 지상계와 천상계에서 모두 통용되는 물리법칙을 탐구했다. '사과는 땅으로 떨어지는 데 왜 달은 지구로 떨어지지 않을까?'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사실을 의심했다. 지상계는 인간의 영역, 천상계는 신의 영역으로 명확히 구분되던 때다. 두 영역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뉴턴이 처음이었다. 그 결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고, 달도 사과처럼 지구로 추락 중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학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기술한 뉴턴조차 신의 존재를 굳건히 믿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신에 대한 통념이 얼마나 지배적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더 파격적이다. 시간과 공간이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그물처럼 하나의 장을 이룬다는 말도 안 되는 의견을 제시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시공간으로 늘 함께 존재한다. 질량은 시공간을 왜곡시킨다. 질량이 큰 천체는 주변 시공간을 왜곡하고, 그 질량이 임계점을 넘기면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해 우주에 구멍이 난다. 그 구멍을 흔히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블랙홀을 수학적으로 예견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뉴턴이 설명하지 못했던 중력의 정체를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의 왜곡으로 밝혀냈다. 또한 상대성 이론은 질량과 에너지가 상호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이것을 나타낸 공식이 그 유명한 E=mc2이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면 책 한 권이 필요하므로 여기까지 알아보기로 하자.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질량. 서로 상반된 개념으로 분류되던 것들이 알고 보니 동전의 양면처럼 다르게 보일 뿐 사실 그들은 한 몸이었다.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면 결코 할 수 없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발상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계에 파격과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며 아인슈타인에게 파격과 혁신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상대성이론에서 비롯된 우주 확장설을 부정했다. 허블이 구체적인 관찰 증거를 내밀자 그제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은 1900년대 초 태동하던 양자역학과 끝까지 맞서 싸웠다. 젊은 시절 아인슈타인을 닮은 청년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선보였고,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이젠베르크, 닐스보어는 실재하는 세상을 의심하며 양자역학을 창시했고, 양자역학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이끈 대전환의 영향은 단순히 천동설을 지동설로 뒤집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의 뒤를 이은 케플러는 지구가 태양을 완벽한 원이 아닌 타원 궤도로 공전하는 것을 밝혔고, 그의 뒤를 이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수학적으로 자연을 기술하기에 이르렀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죽는 날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고, 그는 과학을 중세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코페르니쿠스는 과학을 대하는 태도와 접근하는 방식을 전복시킨 선구자인 셈이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다고 여기는 과학적 사실이 늘 당연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지금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실도 언젠가 거짓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과학이 진리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과학은 오히려 진리와 거리가 멀다. 과학은 일리가 있을 뿐 진리는 없다. 더 일리 있는 이론이 나오면 기존의 이론은 역사의 뒷길로 사라진다.



비판적 사고는 일생생활 속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면 오개념을 갖게 된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잘 못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여름철 문 닫고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실을 믿는 데는 신문 기사의 탓이 크다. 여름이면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틀고 자다가 죽었다는 기사가 한 번은 꼭 실린다. 이런 기사는 놀랍게도 1900년대 초부터 이어졌다. 이런 기사를 접한 할머니들은 자식에게 선풍이 틀고 자면 죽는다며 잔소리를 했고, 그 잔소리를 듣고 자란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하며 100년 가까이 선풍이 괴담이 이어진 것이다. 그들에게 선풍기를 틀고 자면 왜 죽냐고 물어보면 저체온증으로 죽는다거나 질식사한다거나 저마다 근거를 가지고 있다. 선풍기 틀고 자는 것을 염려하는 엄마에게 그럼 에어컨 틀고 자면 괜찮냐고 물어보면 그건 괜찮다고 한다. 저체온증이 사망의 원인이라면 에어컨이 선풍기보다 더 위험하지 않을까? 그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사실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이유를 찾아 붙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공고히 한다. 답은 정해져 있고, 그것에 맞는 근거를 억지로 맞춰 끼우는 식이다. 보통의 정보 전달 방식과 그 순서가 반대로 이뤄진다. 무비판적 판단이 이뤄질 때 대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 다른 예로 전자레인지 괴담이 있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갈 때 그 앞에 서있으면 전자파에 노출돼서 건강에 해롭다는 괴담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주부들은 이것을 믿고 자식이 전자레인지 앞에 서있으면 눈이 나빠진다며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근거 없는 낭설이다. 전자레인지는 마이크로파를 이용하여 음식을 데운다. 전자기파는 파장의 길이에 따라 구분되는데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강하고, 길수록 에너지가 약하다. 에너지가 강한 전자기파로는 X선과 자외선이 있다. 이들은 에너지가 강하기 때문에 유전자 변형을 일으킬 수 있어서 유의해야 한다. 정형외과에서 X선 촬영을 하기 전 임신 가능성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외선보다 파장이 길면 대체로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 그렇게 때문에 가시광선이나 적외선은 우리가 일상생활에 자주 활용된다. 적외선 찜질을 하기도 하고, 리모컨이나 자동문 센서에 활용되기도 한다. 적외선에 닿았다고 해서 어딘가 찌릿하거나 눈이 나빠지지 않는다. 전자레인지가 쓰는 마이크로파는 적외선보다도 더 파장이 길다. 에너지가 더 약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인체에 무해하고 유전자 교란을 일으키지 못한다. 더 군다가 전자레인지는 금속판으로 가림막이 되어 있어 마이크로파가 새어 나오지 못한다. 음식을 따뜻하게 해 준다는 것과 작동할 때 발산되는 빛 때문에 이런 괴담이 퍼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괴담이 낭설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서 전자레인지 사용에 불편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어릴 적 초등학교에서 양파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한 양파에는 좋은 말을 하고, 다른 양파에는 못된 말을 했다. 좋은 말을 들은 양파는 잘 자라고, 못된 말을 들은 양파는 시들어버렸는데 그것을 보여주며 말을 곱게 해야 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 교훈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양파 실험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하다. 이것이 신뢰성이 있으려면 양파가 적어도 100개 국어를 한다는 것이 밝혀져야 한다. 국내 여러 과학관에서 관장을 지낸 이정모 관장은 재밌는 예로 양파 실험의 비과학성을 꼬집었다. "경치가 좋다는 말이 일본어로 '게시키 가 우스쿠시'인데 만약 양파에게 '게시키 가 우스쿠시'라고 말하면 양파가 시들까요?" 라며 이정모 관장은 재밌는 질문을 던진다. 양파는 전혀 못 알아들을 것이다. 실험 결과가 그렇게 나온 까닭은 아마도 실험자의 의도가 과정에 반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결과를 정해놓고 실험을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릴 적 심어진 잘못된 정보는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이정모 관장은 이런 사례들을 들며 과학 문해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면 더워도 선풍기를 끄고 자야 하고, 전자레인지 사용에 불편함을 겪어야 한다. 어디선가 주어진 정보라도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 사고가 결여되면 악해지지 쉽다고 말했다. 악한 감정이 무비판적 사고에서 비롯되기 쉽다는 것을 나치 당원이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연구하며 깨닫는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특별히 사악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평범해 보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우리는 수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은 뼛속부터 사악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가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도록 한 사악함은 어디서 왔을까? 한나 아렌트는 무비판적인 그의 공무원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학살을 해야겠다 생각해서 자행하기보다는 위에서 시킨 일을 열심히 따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끔찍한 범죄일지라도 받아들이고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물론 도덕성적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인 것도 있지만 무비판적 태도가 악한 행동으로 이어진 다는 것을 한나 아렌트는 강조했다. 그리고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다. 특정 문구를 언급하자면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악의 평범성은 특별히 사악하거나 비상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사유하지 않는 결과로 발생한다"


이 문구에서 아렌트는 악이 특별히 비범하거나 괴물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 없이 체제에 순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맹목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늘 깨어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진리를 품고 산다. '시간은 흐른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 '물은 100도에 끓는다.' 이 처럼 기본적인 물리법칙과 '가족은 소중하다.' '약자를 돌봐야 한다.' '살인하면 안 된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등등 사회적, 도덕적 규범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변에 현혹되고 세뇌된다. 종교적 신념, 사회의 통념, 언론의 보도, 부모님과 선생님이 해주던 말들은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우리 눈에 색안경을 씌운다. 국가, 민족, 지역에 따라 모양은 다르지만 누구나 색안경을 하나씩 끼고 있다. 의식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색안경을 끼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한다.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객관적이고 올바르게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종족의 특성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프렌시스 베이컨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빠지기 쉬운 오류들을 '4대 우상'으로 설명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은 인간이 감각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한다는 본성적 편견을 말한다.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의 교육, 경험, 성향 등을 통해 형성된 개인적 편견을 말한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나 소통에서 비롯된 오류를 말한다. '극장의 우상'은 전통적 철학, 종교, 학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말한다. 비판적인 사고가 결여되면 우리는 베이컨이 꼬집은 대로 자신만의 우상에 갇혀 오류를 범하게 된다. 정보가 틀릴 수 있다는 비판적 사고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은 우리가 악해지거나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보호한다.


세상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움직인다. 비판적인 태도가 결여되면 천동설을 믿던 사람들처럼 의심 없이 대세를 따르게 된다. 주체성을 잃고 통념대로 생각한다. 때가 되면 취업하고, 때가 되면 결혼하고, 때가 되면 자식을 낳고 기르고. 모두가 사는 방식대로 살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나에게 어울리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사과나무로 유명한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런 말을 했다.

'새로운 발상에 놀라지 마라. 다수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진실이 아니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주변과 같은 인생을 살기 위해 애쓰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결국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인생에 대해서 100개의 인생이 있다면 100개의 답이 있다고 말한다. 나의 삶은 유일하고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고, 때로는 위협을 받더라도 자신의 이론을 굳건히 지켰던 과학자들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내가 찾은 해답을 믿는 담대함.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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