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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Oct 09. 2024

될 놈은 뭘 해도 된다.

카오스 이론


삶은 결정되어 있을까?

니면 자유의지 개척하는 것일까?


세상이 결정되어 있다면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내가 너무 안타까울 것 같다. 미래에 어떤 삶을 살지 결정되어 있는 판국에 굳이 힘들게 공부를 하고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반대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칭찬은 여우가 받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확률이 희박한 일이 벌어질 때면 이미 세상이 결정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최근 동탄에 로또 청약 공모가 있었는데 당첨될 확률이 무려 300만 대 1이었다. 누가 당첨될까 싶었지만 당첨자는 나타다. 이런 맥락에서 '될놈될 안될안(될 놈은 뭘 해도 되고,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된다.)'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과학손을 들어준 쪽은 '결정론'이었다. 뉴턴은 지상계에서 일어나는 운동뿐 아니라 천상계에서 벌어지는 운동지 모두 수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일컬어지는 물리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우주에 떠있는 행성의 움직임을 완벽히 예측했고, 굴러가는 공의 위치와 속도만 알면 1만 년 공의 위치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무작위로 무언가를 정할 때 동전 던지기로 정하곤 하는데 정말 무작위로 사건이 벌어질까? 기조건과 동전에 가해진 힘의 크기를 안다면 충분히 계산이 가능하다.


아인슈타인 강경 결정론자였다. 함께 연구했던 동료가 죽자 그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작성한 편지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이상한 세상을 저보다 조금 먼저 떠났습니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물리학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단지 완고하게 끈질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은 결코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래 차원을 본다면, 아래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처음과 끝이 동시에 보다. 우리가 사진이나 그림을 볼 때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3차원에 사는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일들이 4차원에서 보면 이미 결정된 일로 보일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아인슈타인편지에 적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자연에 갑작스러운 일은 없다. 5분 후 우리에게 일어나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지 그 일이 일어나기로 결정된 것은 한참 전의 일이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원인을 쫓아가다 보면 결국 모든 사건은 빅뱅으로 귀결된다. 나의 탄생과 죽음 빅뱅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AI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릴 만큼 과학이 발달했는데 아직도 내일의 날씨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자연이 결정론을 따른다면 날씨를 수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곤란함을 겪은 사람이라면 날씨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기상청을 한 번쯤 욕한 적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기상청이 날씨를 정확히 알고 싶을 텐데 말이다.


기상학자 로렌츠는 기후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하여 기상을 분석하던 중 초기 조건을 조금 손봤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자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0.506127이라는 값을 0.506으로 입력했더니, 약간의 차이가 점점 커져 완전히 다른 예측이 된 것이다.


로렌츠는 이러한 현상을 '카오스 이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조그마한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큰 차이를 일으킨다는 '민감한 초기 조건 의존성'이 카오스 이론의 핵심이다. 그는 카오스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었다.


'브라질 열대우림의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이
북미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나비효과가 이렇게 탄생했다. 민감한 초기 조건 의존성이 카오스 현상을 야기한다면 초기 조건을 완벽하게 측정하여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완벽한 측정이 불가능한 이유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로 설명해 보자. 하이젠베르크는 닐스보어의 제자로 양자역학을 정상과학의 궤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다. 그는 건강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헬골란트 섬에서 역사적인 발견을 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하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수학 계산을 계속 틀렸다고 한다. 그만큼 불확실성의 원리는 과학계에서 기다리던 지식이었고 기존의 이론으로는 풀 수 없던 전자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불확실성의 원리에 따르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완벽하게 측정할 수 없다. 위치를 측정하면 운동량이 불확실해지고, 운동량을 측정하면 위치가 불확실해진다. 우리는 관측하기 위해 반드시 빛을 이용해야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관찰 대상에 부딪히고 돌아오는 빛을 인지하는 과정이다. 엄밀히 따지면 대상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대상과 부딪히고 반사된 빛을 보는 것이다. 거시세계에서는 관측에 활용되는 빛이 전혀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사람, 필통, 스마트폰 이런 것들은 빛과 비교했을 때 월등히 크기 때문에 빛과 부딪히더라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지만 전자는 상황이 다르다. 전자는 빛과 견줄 만큼 작고 연약하다. 빛이 부딪히면 위치가 밀려버린다. 마치 당구공끼리 부딪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자를 측정하기 위해 발사된 빛이 전자의 위치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반사되어 돌아온 빛은 변화되기 전 전자의 위치를 보일 뿐 자신으로 인해 변화된 전자의 위치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수준에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양자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미시세계는 결코 완벽하게 측정할 수 없다. 확률적으로 짐작만 가능하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토대를 다진 고전역학대로 자연을 기술하려면 위치와 운동량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불확실성의 원리는 고전역학이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새로운 역학인 양자역학이 필요함을 시사했다. 이 과정에서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신진 과학자들 사이에서 수 차례 언쟁이 벌어졌다.


아인슈타인은 현재 우리가 기술의 부족으로 측정하지 못할 뿐, 전자는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기술하려는 닐스 보어에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닐스 보어는 '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며 맞받아쳤다. 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피 튀기는 논쟁을 한 결과 과학계는 닐스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닐스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연구했던 장소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창시한 양자역학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부르는데, 코펜하겐 해석을 바탕으로 발전한 양자역학은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기술하고 있다.


정리해 보자. 카오스 이론은 결정론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결정된 사건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을 결정론적 혼돈이라고 부른다. 결정론적 혼돈은 불확실성의 원리에 기인한다. 초기 조건을 완벽하게 측정할 수 없고, 그 미세한 차이가 시간이 지나며 나비효과처럼 불어나 예측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이 현재 과학으로 입증된 세계관이다.


카오스 이론도 결국 결정론의 일부라는 점에 실망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긴 이르다. 카오스 이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자유의지가 끼어들 틈을 발견할 수 있다.


16세기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떠들썩했다. 종교 개혁을 대표하는 인물로 루터와 칼뱅이 있다. 이중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칼뱅이다. 칼뱅이 주창했던 구원예정설은 카오스 이론과 매우 흡사다.


구원예정설은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을 이미 정해두었다는 신학적 개념이다. 종교 결정론인 셈이다. 구원받을 사람이 이미 결정됐다고 하면 신자들이 교회를 오지 않고 세속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구원예정설을 믿는 신자들은 누구보다 교회를 성실히 다니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모범적인 생활을 보였다.


그 이유는 자신이 구원을 예정받은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구원이 점지된 사람이 흥청망청 살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구원이 예정된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카오스 속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미래결정되어 있지만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믿을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붙을 미래가 기다릴 것이라고, 성공한 삶을 꿈꾼다면 찬란한 미래가 기다릴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구원예정설을 믿었던 신자들처럼 말이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결정되어 있을지 믿을 자유'


그것이 결정된 세계관에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인 것이다.


'될놈될 안될안'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청약에 당첨된 사람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설마 내가 되겠어~"이런 심정이었겠지만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무조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수고스럽게 청약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가냘픈 믿음이 그를 될 놈으로 만든 셈이다.


모두가 자신이 될놈될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은 믿음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미래가 결정되어 있을 것이란 믿음. 믿음은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록 나를 독려한다.


나의 사소한 행동이 나비효과처럼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흘린 땀방울이 나를 될놈될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도 모른다. 결정론을 따르는 자연 속에서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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