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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Oct 09. 2024

시간의 화살

열역학 제 2법칙

우리는 흔히 시간을 일방통행의 길처럼 생각한다.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일생은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젊어지는 일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지만 사실 물리적으로 시간이 꼭 한 방향으로만 흘러야 할 이유는 없다. 시간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신비롭게 느껴진다.


시간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탐구해 온 대상이다. 태고의 인간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해가 떠오르고 지는 주기를 하루로,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를 한 달로 삼았다. 태양과 달이 고대의 시계였다. 그러나 지구의 자전과 공전, 달의 움직임은 완벽하게 일정하지 않았다. 해마다 세밀한 차이가 발생했다. 고대인들의 신비와 불확실성의 대상이었던 이러한 차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과학적 도전에 맞닥뜨렸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미세한 차이조차 용납할 수 없었고, 시간 측정의 정확성에 대한 요구는 점점 높아졌다. 오늘날, 우리는 원자의 진동을 이용해 시간을 정의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용하는 1초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절대온도 0도에서 세슘-133 원자가 방출하는 특정 파장의 빛이 9,192,631,770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원자에 대한 이해와 기술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거의 오차 없는 시간 측정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시간을 측정하는 기술이 정교해졌다고 해서 시간 그 자체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다. 시간이라는 신비로운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원자 수준의 정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바뀔까? 우리는 흔히 영화나 소설에서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을 한다. 늙은이가 젊어지고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위기를 극복하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하지만 실제로 시간의 흐름이 뒤바뀐다고 해도 우리가 예상하는 만큼 세상이 크게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물리학적으로 대부분의 자연법칙은 시간의 흐름이 반대가 되더라도 그 모습이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 법칙을 생각해 보자. 뉴턴의 법칙에 따르면,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운동은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공을 위로 던질 때 공은 점점 느려지다가 최고점에 이르면 속도가 0이 되고, 다시 가속하며 땅으로 떨어진다. 이 운동을 영상으로 찍어 역재생한다면, 우리는 공이 위로 올라가다 떨어지는 모습과 거의 동일하게 보일 것이다. 이는 공의 운동이 시간에 대해 대칭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방향이 반대로 흐른다고 해서, 공의 궤적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대칭적인 운동이 아닌 비대칭적인 과정이야말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이 비대칭적인 과정 중 하나가 바로 열의 흐름이다. 열에너지는 항상 높은 온도의 물체에서 낮은 온도의 물체로 자발적으로 이동한다. 냉동고에 물을 넣으면 물이 어는 것은 '냉기'가 물을 얼린 것이 아니라, 온도가 높은 물이 주변으로 열을 잃으며 차가워지는 현상이다. 이 과정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으며,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고 해도 열이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으로 자발적으로 흐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사디 카르노는 효율적인 증기기관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열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열은 항상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고, 이는 열역학 제2법칙의 핵심이자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열의 이동과 엔트로피의 증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을 '앞으로 흐른다'라고 느끼는 이유다.


엔트로피란 시스템의 무질서도나 가능성 있는 상태의 수를 의미하는데, 고립된 시스템에서는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예를 들어, 차가운 방에 놓인 따뜻한 커피는 점차 식어가고, 다시 뜨거워지는 일은 없다. 이처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은 비대칭적이다. 만약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아야 하지만 우리는 그런 현상을 경험하지 못한다.


결국,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이유는 대칭적인 운동이 아니라, 엔트로피의 비대칭적 증가 때문이다. 시간은 단순히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을 나열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물리적 개념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흐름의 비대칭성을 설명하는 열역학적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시간은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을 정해주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자주 '무질서도가 높아진다'라고 표현되는데, 쉽게 말해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보면, 엔트로피의 증가는 불균질 하게 분포되어 있던 물질이 점점 더 균질하게, 즉 더 고르게 섞여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가 높아진다는 것은 비평형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평형'이라는 단어를 듣고, 흔히 더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상태를 떠올린다. 마치 정돈된 방이나 가지런히 배열된 책장처럼 말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이 전혀 다르다. 평형 상태는 오히려 무질서도가 최대가 된 상태, 즉 엔트로피가 최고조에 이른 상태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잉크 확산 실험을 생각해 보자. 투명한 물이 담긴 컵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잉크가 떨어진 직후, 그것은 한 곳에 작은 방울로 모여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잉크는 물속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물 전체에 고르게 분포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처음에 잉크가 한 방울로 모여 있을 때, 이 상태는 매우 불균질 하고, 질서 정연하며 비평형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잉크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확률적으로 매우 낮은 상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잉크는 물 분자 사이사이로 퍼져 더 균질하고, 어질러진 상태로 변한다. 이 새로운 상태가 바로 평형 상태다. 잉크와 물이 섞여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균질해지면, 이는 모든 가능성이 동등해진 상태이며, 무질서도가 최대인 상태다.


우리가 이 현상을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이유는, 잉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퍼져 나가고, 다시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잉크가 이미 물속에 고르게 퍼진 상태에서 갑자기 한 방울로 다시 모인다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일인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이는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 것이다.


엔트로피가 높아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무질서도는 증가하고, 물질은 자연스럽게 균질하게 섞이려 한다. 잉크 한 방울이 물 전체에 퍼지는 과정은 우리가 "평형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무질서와 관련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어떤 에너지를 추가로 가하지 않아도 잉크는 물속에서 고르게 퍼진다. 이는 물질이 고르게 섞인 상태가 훨씬 더 많은 가능한 상태를 가지기 때문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평형은 질서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어지럽게 섞여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잉크가 퍼지는 이 현상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연은 항상 더 많은 가능한 상태를 선호하며, 이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이유다.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과정은 비평형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 즉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시간의 방향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독특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체다. 생명체는 마치 자연의 법칙에 도전이라도 하듯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고 유지한다. 예를 들어, 세포는 단백질, DNA, 그리고 다양한 분자들을 매우 정교하게 배열해 구조와 기능을 유지한다. 이는 마치 흩어져 있는 퍼즐 조각들이 스스로 움직여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법칙과는 어긋나 보인다.


이 현상에 대해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그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질서의 증가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외부에서 받아들이며,
그 에너지를 이용해 내부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즉, 생명체는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여 내부의 엔트로피를 낮추고 정교한 구조를 유지하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슈뢰딩거는 이를 "음의 엔트로피(negative entropy)"라고 불렀다. 생명체는 외부에서 얻은 에너지를 사용해 스스로의 무질서를 줄이고, 더 높은 수준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점이 있다. 생명체가 내부 엔트로피를 낮추는 동안, 생명체가 속한 더 큰 시스템, 즉 그 생명체와 상호작용하는 주변 환경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예를 들어, 방을 정리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방이 어지럽혀진 상태에서 우리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청소를 하고 물건을 정리함으로써 방 안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에너지를 소비하며 이로 인해 몸에서 열을 방출하고 주변 공기 분자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즉, 방이라는 국소적인 영역에서는 엔트로피가 낮아지지만 전체적인 우주에서는 오히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명체도 외부에서 에너지를 가져와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며, 그 과정에서 외부 환경의 엔트로피를 더 많이 증가시킨다. 생명체는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그 에너지를 통해 내부 엔트로피를 낮추지만 그 과정에서 열을 방출하거나 폐기물을 배출함으로써 주변 환경의 엔트로피를 더 많이 증가시킨다. 따라서 생명체는 국소적으로는 엔트로피를 낮추지만 전체적으로는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생명체는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법칙을 활용해, 자신만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독특한 존재이다. 생명체가 에너지를 사용하여 내부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동안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이나 다른 형태의 에너지는 주변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면서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생명체는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 안에서 에너지를 교환하며 스스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체는 전체 우주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국소적으로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과정은 생명체가 자연의 법칙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활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우주는 늘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은 이를 '시간의 화살'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시간이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을 의미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과거에서 미래로의 이 흐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그렇다면 시간이 이렇게 무한히 뻗어나가면, 우주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엔트로피는 늘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결국 '열죽음'에 도달할 것이다.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도달하면 우주는 평형 상태에 이르고, 모든 열은 사라지며 아무런 운동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상태가 된다. 모든 별이 소멸하고, 모든 행성이 멈추며, 빛조차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 그 순간, 우주는 단지 끝없는 침묵 속에서 멈출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균질한 상태를 안정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르면, 균질한 상태는 그 어떤 역동성도, 변화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 모든 것이 고르게 섞이고, 모든 에너지가 분산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없다. 생명과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단조롭고 완전히 균질한 공간뿐이다.


이 종말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엔트로피의 법칙이 보여주는 것은 변화와 다양성이야말로 생명과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점이다. 우주가 살아 움직이고 새로운 별과 행성,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은 그 안에 불균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주가 불균질 하기 때문에 생명도 태어날 수 있었다. 균질함만으로는 생명과 성장, 창조가 가능하지 않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 속에서 생명은 불완전함과 다양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가 열정적이고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다양한 사고와 의견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획일성과 고정된 질서는 사회를 안정시킬 수는 있지만, 결국 그 속에 생명력과 창조의 불꽃을 잃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를 한정 짓지 않고, 무수한 가능성과 사고의 다양성을 허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큰 의미와 더 많은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다.


우주의 마지막 운명이 열죽음 일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가고, 배우고,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의 화살이 우리를 끝으로 인도할지라도, 그 길 위에서의 여정은 우리에게 무수한 깨달음과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완벽한 균형이 아닌 혼돈 속의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에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이다.


시간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우리가 시간의 한 방향성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는 있어도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은 여전히 모호하다. 철학자 칸트는 시간에 대해 흥미로운 정의를 내렸다. 그는 시간을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인식적 틀'로 보았다. 쉽게 말해, 시간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내재된 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시간이라는 틀로 해석하며, 변화를 시간의 흐름으로 인식한다. 엔트로피의 증가 또한 우리가 이 틀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을 단지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느끼는 시간은 인과관계를 전제로 하지만, 양자세계에서는 이 인과성이 흔들린다. 양자 세계에서는 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주는 일이 벌어지고, 결과가 원인에 영향을 미치는 모순이 나타난다. 이는 우리가 익숙한 시간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로벨리는 시간은 우리가 고차원 세계를 이해하려고 만든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고차원의 시각에서는 모든 사건이 확정되어 있지만, 저차원인 우리의 시각에서는 그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느끼는 것이다. 마치 1차원의 세계에서 일자로 그어진 직선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점들의 연속으로 이해하듯 말이다. 1차원의 관점에서는 점들이 시간에 따라 하나씩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직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이 착각일지라도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든 흐르지 않든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막에는 가냘픈 목으로 커다란 머리를 지탱한 채 하늘을 바라보는 바위가 있다. 머리는 크고 목은 가늘어서 마치 위태롭게 서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바위가 처음부터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은 아니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비,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바위를 조금씩 깎아내며 그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바위의 목에는 오랜 풍화로 생긴 깊은 흉터가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그 가는 목은 결국 부러지고 바위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바위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어떤 심정으로 그 바람을 맞이할까?


우리가 느끼는 시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 늙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아름답든 평범하든,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다. 부처님도 생로병사의 길을 걸었고,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시간을 멈추거나 거꾸로 돌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물리학이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시간은 단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엎질러진 물이 다시 그릇에 담기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은 늘 과거에서 미래로만 흐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부처님과 우리가 같은 생로병사의 길을 걸어간다는 점은 같지만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 있다. 시간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그 흐름은 덜 고통스러울 수 있다. 반면에, 그 흐름에 맞서 싸우려 한다면 그 저항이 오히려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들 것이다.


때로는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며 그 성장이 너무 빨라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깊어지는 어머니의 주름을 볼 때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이 얄밉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을 탓하고 아쉬워한들 그 순간에도 엔트로피는 여전히 높아지고 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바꿀 수 없지만 그 흐름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흐르는 시간을 애타게 붙잡으려 하기보다 그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놓아주고 최대한 삶의 순간을 충만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자연의 일부로서 우주의 이 법칙을 이해하고 따르는 방법을 배우게 될 지도 모른다.


사막의 바위도 언젠가 자신의 목이 부러지고 무너질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바위는 바람을 맞고 비를 견디며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바위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존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시간의 화살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든 그 방향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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