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우리는 양자역학의 불연속적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불연속적 특성은 양자역학이 태동하는 데 기여했다. 그렇게 시작된 양자역학 열풍은 과학을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부류가 있었다. 특히 양자역학의 '확률적 특성'과 '관찰자 효과'는 너무 기괴해서 고전 물리학자들에게 빈축을 샀다. 이런 기괴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실험이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의 본성을 탐구해 보자.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사실 누구보다 양자역학을 부정했던 사람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그런 맥락에서 설계된 사고 실험이다.양자역학의 불합리함을 보여주기 위해 설계되었는데 오히려 양자역학의 특징을 너무 잘 보여주어서, 지금은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실험으로 자주 소개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측이 실험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관찰자 효과'라고 부른다. 관찰자가 실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기존의 과학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관측하지 않았을 때와 관측할 때 실험의 결과가 다른 값을 보인다는 것인데 물질을 독립된 존재로 바라보던 고전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고전 물리학의 대표인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럼 아무도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없는 것이냐!" 하지만 양자의 영역은 아인슈타인의 생각과 달리 관측에 따라 실험 결과가 달라졌다. 달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빛의 입자성을 밝히며 양자역학의 등장에 기여했던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부정했던 것을 보면 양자역학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일지 엿볼 수 있다.
슈뢰딩거가 못마땅했던 부분은 양자의 확률적 특성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는 관찰하기 전에는 객관적 위치를 갖지 않고 확률적으로 분포한다. 이 말은 전자가 어디 있냐는 질문에 50%의 확률로 이곳에, 25%의 확률로 저곳에 있다는 식으로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한 초기 위치가 정해져야 전개되는 고전 물리학과 완전히 상반된 내용이었다. 슈뢰딩거는 자연이 확률로 묘사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다. 원자 수준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사는 거시적 수준에서는 확률적 특성이 결코 나타나지 않는 다고 말하며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제안했다.
실험은 이렇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밀폐된 상자에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상자에는 양자 장치가 있고, 원자와 해머 그리고 독약이 설치되어 있다. 원자는 불안정해서 붕괴할 확률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붕괴할 확률을 50%라고 해보자. 50%의 확률로 원자가 붕괴하면 센서가 그것을 감지하여 해머를 작동시킨다. 해머는 독약을 깨뜨리고 그 결과 고양이는 죽게 된다. 반대로 50% 확률로 원자가 붕괴하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목숨을 부지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확률로 붕괴하는 원자다. 기존의 고적역학적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밀폐된 상자를 열고 관측하는 것과 별개로 고양이의 생사는 결정된다. 고양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죽거나 살거나 두 가지밖에 없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전혀 다른 답을 도출한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상자를 열고 관측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생사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양자역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첩은 '확률로 존재한다'라고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다. 원자는 50%의 확률로 중첩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원자에 목숨이 달린 고양이도 중첩된 채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실험에 따르면 원자의 붕괴 확률이 50%고 이에 따라 고양이의 생사도 50%의 확률을 갖는다. 그렇다면 50%만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기서 논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고는 이번 여행에서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관측은 중첩을 깨뜨린다. 관찰자가 실험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가 그것이다. 관찰자가 관측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확률적 특성이 결정된다. 관측하지 않을 때 사건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고, 관찰자가 관측하면 중첩이 깨지고 확실한 사건으로 드러난다. 밀폐된 상자를 여는 순간 고양이는 생사가 결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직관을 벗어나는 양자의 성질을 잘 보여주는 실험이다. 이실험은 양자역학의 핵심인 '확률적 특성'과 '관찰자 효과'를 강조한다.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복습하며 잠시 숨을 고르자. 원자는 관측하지 않을 때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관측할 때 그 모습이 결정된다. 관측이 존재를 결정하는 셈이다. 지금까지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실험을 준비하고 받아 적는 단순한 역할만 수행했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과학자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들은 관찰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관찰자의 여부는 실험 결과에 영향을 준다. 과학자의 위상이 들러리에서 관찰자로 한 층 격상되었다.
관찰자 효과는 우주의 존재 이유를 규명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인류원리에 따르면 우주는 우주를 관찰할 지적생명체가 있기에 존재한다. 만약 우주를 관측할 대상이 없다면 우주는 중첩된 채로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관찰자가 등장하여 우주는 관측되었고 중첩에서 벗어나 존재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류원리는 정도에 따라 구분되는데 가장 강한 인류원리의 경우, 우주는 지적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희박한 확률을 뚫고 지금 같은 물리법칙을 가지게 됐고 그렇게 등장한 인류 덕분에 관찰되어 존재한다고 말한다. 정말 인간중심적인 사고지만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의견이 논의된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닐 것이다.
인류원리를 처음 제시한 과학자 브랜드 카터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의 상황이 반드시 중심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불가피하다."
양자역학은 예상치 못한 여러 이론을 창조했다. 시뮬레이션 우주론과 인류원리. 그리고 소개하진 않았지만 다세계 해석이라는 다중우주론의 과학적 토대가 되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에 재밌는 상상을 추가한다. "만약 고양이가 든 밀폐된 상자 안에 다른 사람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이제 관찰자가 두 명이다. 한 명은 밀폐된 상자 속에 고양이와 함께 있고, 다른 한 명은 밀폐된 상자 밖에 존재한다.
자 이제 다시 실험을 진행해 보자. 원자의 붕괴는 관측할 때 결정된다. 상자 안에 있는 사람은 원자를 관측하고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관측할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상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결정 난 사건이 상자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중첩된 채로 존재한다. 사건이 상대적으로 나뉜 것이다. 처음 로벨리가 제안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허점을 찾아보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받아들이자 예능에서 머리에 초록색 가루가 펼쳐지는 효과를 경험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건의 상대성'은 우리 세상을 더 정확히 설명했다. 예를 들어보자. 친구와 동전 던지기로 라면 끓이기 내기를 했다고 해 보자. 친구가 동전을 던지고 손등과 손바닥으로 빠르게 감싼다. 그리고 살며시 손을 올려 결과를 확인한다.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친구는 결과를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50 대 50의 확률로 짐작할 뿐이다. 나는 친구가 나 몰래 술수를 쓸까 봐 예의주시한다. 로벨리의 말처럼 동일한 사건이지만 관측의 여부에 따라 상대적으로 존재한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역학으로 우리 세상을 정확히 묘사했다.
양자역학과 조금 친해진 느낌이 든다. 여러 고양이도 만났고 상자 속에도 들어갔다 왔다.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완벽히 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양자역학은 언어의 영역을 넘어선다. 우리는 언어를 벗어난 생각을 할 수 없다. 철학자들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했다. 양자역학을 정확히 기술하는 언어는 아직 없다.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상태를 우리가 떠올릴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양자역학을 정확히 기술하는 용어가 만약 창제된다면 양자역학이 난해하다는 인식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길 기대한다. 하지만 직관에 어긋하는 사건이 워낙 많은 터라 양자역학을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과학은 철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기존의 철학에 영향을 미친다. 철학에서 존재를 논하는 입장으로 실재론과 관념론이 있다. 실재론은 우리와 별개로 세상이 존재한다는 입장이고, 관념론은 세상은 허구고 관념이 진짜라는 입장이다. 단순화하여 설명하면 실재론은 세상이 객관적이고 모두에게 동일한 모습을 갖는다고 말하고, 관념론은 세상이 주관적이고 사람에게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이 두 가지 입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제3의 입장을 제안한다. 카를로 로벨리가 제시한 '관계론'이라고 불리는 제3의 입장은 세상은 우리와 별개로 존재하지만 확률 상태로 중첩되어 있고, 관찰자가 관측할 때 정확한 사건으로 결정되다고 말한다. 실재론과 관념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특징을 갖는다.
관계론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사물은 허상이다. 존재하는 것은 관계지 사물이 아니다. 관계가 맺어질 때 사물은 비로소 존재감을 갖는다. 관측되지 않으면 사물은 존재감을 잃고 다시 확률 상태로 접어든다. 중첩된 세상에 떠도는 신세가 된다. 관계론은 이런 측면에서 불교의 '인연'과 공통적 면모를 보인다.
불교에서는 존재를 인연으로 설명한다. 크기라는 개념은 크기가 서로 다른 사물이 인연을 맺을 때 생긴다. 모든 사물의 크기가 동일하다면 크기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사물의 관계에서 크기는 의미를 갖는다. 크기가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이 관계에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나'를 오온이 모여 우연히 생긴 허상이라고 말한다.내가 아닌 부분과 내가 인연을 맺을 때 '나'를 정의할 수 있다. 불교는 나와 내가 아닌 부분을 경계 짓는 것을 부정한다. 나와 세상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진실로 깨달을 때, 나와 세상이 갖는 인연이 깨지고 나의 존재를 잃어버린다. 그것이 불교에서 도달하려는 궁극적 목표인 무아의 경지다. 관계론과 불교의 인연은 모두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 보이지 않는 관계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그것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불교와 양자역학의 접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그의 저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유사성을 집대성하였다. 현대물리학은 이분법적 사고가 깔려있는 서양사상과 괴리가 있었지만 일원론을 기본으로 하는 동양사상과는 매우 친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교와 불교는 현대물리학과 놀라운 만큼 공통점을 보였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불교는 '세상이 공하다'라고 말한다.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과 다르다. '비어있다'에 더 가깝다. 껍데기는 있지만 의미는 없다는 뜻으로, 물질이 존재하지만 그저 존재할 뿐 고귀하다거나 천박하다거나 이런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학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원자가 모여 별을 이루기도 하고, 바위를 이루기도 하고, 지렁이를 이루기도 하며 인간을 이루기도 한다. 그것은 원자가 모여 생긴 존재지 지렁이는 천박하고 인간은 고귀하다는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그것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지 자연이 아니다.
물리적으로도 공하다는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원자의 99%는 진공으로 되어있다. 만약 사람을 이루는 원자에서 진공을 뺀다면 사람은 소금 한 톨의 크기가 된다. 전 세계 인구를 모두 모아도 사과 한 개 크기에 불과할 것이다. 만물은 원자로 되어있으므로 우주는 비어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것보다 정확할지도 모른다.
원효대사가 설법한 '일체유심조'는 양자역학적 특성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원효대사는 불교를 배우기 위해 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당나라로 향하는 길에 어느 날 밤이 깊어 근처의 동굴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목이 말랐던 원효는 동굴에 고여있던 물을 마시고 잠이 든다. 다음날 해가 밝자 자신이 어젯밤 마셨던 물이 다름 아닌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알게 된다. 어제는 청량함을 주었던 물이 갑자기 구역질을 유발하는 썩은 물처럼 느껴졌다. 원효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당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닫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앞서 살펴본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와 맞닿아있다. 물질은 중첩되어 있다가 내가 관측할 때(의미를 부여할 때) 존재감을 갖는다. 관측하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청량함을 줄 수도 있고 구역질을 유발할 수 도 있다. 그것을 정하는 것은 관측하는 자신이다. 양자역학은 철학적으로도 여러 함의를 지닌다.
끝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말을 살펴보자.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색을 눈에 보이는 물질로 공을 무형의 에너지로 변환하여 생각하면 현대물리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에너지 상태가 되면 에너지는 입자와 반입자로 변환된다. 그리고 입자와 반입자가 결합하면 다시 에너지 상태로 돌아간다. 또한 에너지와 질량이 상호 전환될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물질과 에너지가 구분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발상을 부처님은 어떻게 그 당시 생각해 냈을까 놀라울 따름이다.
양자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는 일찌감치 양자역학이 동양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그가 덴마크 왕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수여받을 때 정한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문장에는 음과 양이 동적으로 섞여있는 태극이 그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양자역학을 잘 표현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과 동양사상의 유사성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동양사상은 철학적 성격이 강하다. 동양사상가들은 연역적으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추론한 끝에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과학은 반면 관측을 토대로 자연을 탐구했는데 그 모습이 동양사상가들이 떠올렸던 모습과 비슷한 것이다. 연역적 추론과 귀납적 발견이 일치를 이룬 것이다.
다시 관계론 이야기로 돌아오자. 실재론과 관념론은 우리의 사고를 양분하여 지배했다. 그 간극에 여러 변칙사례들이 갈 피를 잡지 못하고 끼여있었다. 두 입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던 현상을 관계론은 명쾌하게 해결한다. 경험론과 합리론의 첨예한 논쟁을 칸트가 관념론으로 해결했는데, 이때 공헌한 사람이 다름 아닌 뉴턴이었다. 뉴턴이 발견한 물리 법칙은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이번에는 양자역학이 실재론과 관념론을 종합하여 새로운 진영을 창조하고 있다.
실재론과 관념론이 갖는 한계를 관계론은 말끔히 해결한다. 먼저 실재론은 외부 세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입자의 상태가 관측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실재론이 내세우는 절대적 실재는 현대물리학에 접어들면서 존재하지 않다고 판명 났다. 관계론은 현실을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관계로 정의하면서 실재론의 한계를 극복한다. 관념론은 외부세계가 우리의 인식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데 이것은 모든 존재가 주관적 의식에 결정되는 한계를 갖는다. 현실이 갖는 보편적 특성을 관념론은 입증하지 못한다. 하지만 관계론은 다중 관찰자 간의 상호작용에 기초한 보편적인 개념을 제공한다.
관계론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정식 이론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견해쯤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전통성이 없다고 하여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관계론에 깊게 매료되었고 실재론과 관념론 중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러 사람이 동일한 한 사람을 다른 모습으로 떠올리는 것을 실재론과 관념론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실재론에 입각하여 해석하면 사람의 성격은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사람들이 다른 평가를 내린 것은 그들이 관측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항상 오류를 범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데 세상이 틀릴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관념론으로 해석하면 관찰되는 사람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의 관념에만 의존하여 주관적으로 결정된다. 이는 사람의 보편적인 특성이나 독립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실재론적 해석과 관념론적 해석도 명쾌하지 않다. 관계론은 다음처럼 해석한다. 한 사람의 본질적 특성이 있다. 그것은 여러 성격이 중첩된 상태인데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성격이 결정된다. 관계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결정되는 상태가 차이를 보인다. 누구에게는 선한 사람으로 누구에게는 영악한 사람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와 맺은 관계에서 그의 정체성이 결정되지 때문이다.
관계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도 일부분 해결한다. 실재론에 따르면 신은 신앙과 별개로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두 선택지밖에 없다. 이런 사고가 가장 보편적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종교인과 무신론자들 간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종교인에게는 신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무신론자에게는 존재하지 않기에 누구의 말이 맞는지 결정을 내릴 수 없어 늘 보류된다. 반면 관념론은 너무 말끔히 해결해서 문제가 된다. 종교인에게는 있고, 무신론자에게는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식의 설명이라면 해결 못할 현상이란 없다. 주관적인 사건으로 모든 것을 치부하여 처리한다. 하지만 세상은 물리법칙처럼 사람의 주관적 인식 여부를 떠나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
관계론은 이번에도 '확률적 특성'과 '관찰자 효과'로 신의 존재를 해석한다. 신의 존재는 자연의 일환으로 중첩적으로 존재한다. 사실 신뿐 아니라 모든 관념이 그러하다.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다가 그것을 관측하는 관찰자가 나타나면 그에 한해서 존재한다. 신을 관측한 종교인에게는 중첩이 깨져 존재로 다가오고, 반면 관측하지 못한 무신론자에게는 여전히 중첩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보편적 실체가 없다는 관념론과는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차이를 갖는다. 관측 여부가 신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주장하는 종교인에게 이 견해가 불쾌함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지만 관계론은 새로운 입장으로 현상을 설명한다. 이런 관계론적 해석은 사람의 본질적인 특성도 인정하고, 사람마다 성격을 다르게 파악하는 것도 설명된다. 신이 존재한다는 입장도 인정하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입장도 인정한다. 이런 관계론적 해석은 여러 현상에서 발생하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한다.
나는 무엇일까? 이제 근본적인 의문에 답을 내려볼 차례다. 관계론은 나를 '관찰자'라고 정의한다. 세상의 관찰자 그것이 나의 정체다. 세상은 중첩된 상태에 놓여있다. 내가 관측할 때 존재를 갖는다. 누군가에게는 살만한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지는 것은 세상과 관찰자가 갖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세상 그 자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여러 확률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관찰자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이 결정된다.
인생에 정답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처럼 세상을 느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누구도 내 삶을 나처럼 관측할 없다.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1인칭 시점에서 삶을 산다. 그것이 인생에 주인이 자신이고, 정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나는 내 인생의 유일한 관찰자다.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내가 깨달은 궁극적 메시지는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시대를 관통하여 나타난다. 여러 현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추론으로 이 질문에 답을 내렸지만 그들이 내린 답은 모두 다르다. 예수가 하는 말과 부처가 하는 말이 다르고, 무함마드가 하는 말과 공자가 하는 말이 다르다. 그들 중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인생에서는 그것이 정답이었으니 말이다. 전하는 메시지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메시지에는 공통적으로 어떻게 살지 스스로 정하라는 내용이 깔려있다.
힘든 여정이었다. 이 여정을 통해 세상의 본질과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정의를 살펴보았다. 세상은 중첩되어 있고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관측하여 결정하는 관찰자다. 양자역학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나를 주체적으로 살도록 이끈다.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갈 것을 다짐하며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