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 수학부 허준이 교수는 여러 난제를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왜 난제를 푸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난제가 난제인 이유는 오랫동안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풀 수 없었기 때문이고, 이것을 풀었을 때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난제를 푸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배울 때가 많습니다."
과학계에도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는 난제가 있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분야. 이름하여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은 비교적 최근 정립된 분야인데 인간의 지적 한계를 시험한다.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우리의 인지 능력을 넘어선다. 언어의 범주를 벗어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역학적 현상을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이를테면, 죽으면서 살아있는 고양이를 본 적 있는가? 크면서 작고, 있으면서 없고. 상반된 두 성질이 겹쳐진 상태를 우리는 떠올릴 수 없다.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에 관해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과학을 전공했고, 양자역학과 관련된 책과 영상을 수없이 봤지만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양자역학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과학을 조금이라도 맛보도록 돕는 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지 않은가. 어려운 소재지만 조심스레 적어본다. 허준이 교수가 말한 것처럼 어렵지만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할 것이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뇌 근육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나아가 양자역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지니고 있는 패러다임이 크게 변하는 짜릿한 경험도 맛볼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나는 양자역학을 배운 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극적인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처음 접하는 분야를 공부할 때 단순화하여 골자를 잡는 것은 효과적이다. 그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추후에 다듬으면 될 문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알고자 하는 태도가 때로는 시작을 가로막는다. 특히 양자역학처럼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라면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가벼운 맘으로 양자 세계로 떠나보자.
일단 양자역학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익숙한 단어를 먼저 살펴보면, 역학은 물체의 운동과 힘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분야다. 다루는 대상에 따라 고전역학, 열역학, 양자역학이고 이름이 붙는다. 그렇다면 양자는 뭘까? 양자는 물리적 양의 최소 단위를 뜻한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기본 단위가 양자다. 에너지, 운동량 같은 물리적인 요소가 연속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양자역학에 따르면 그들도 양자로 되어있다. 불연속적이고 최소 단위를 갖는다. 불연속적인 값을 가질 때 양자화 되어있다고 표현한다. 종합하면, 양자역학이란 불연속적인 운동과 힘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학문인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수준은 연속적으로 관찰되지만 원자의 수준으로 들어가면 불연속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원자처럼 미시의 영역을 양자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양자를 원자와 동의어로 쓰는 경우가 많은 데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잘못됐다. 원자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불연속적 특성 그것이 양자다.
그렇다면 불연속적 특성이란 무엇일까? 불연속적이란 뜻은 정해진 값만 지닐 수 있다는 의미다. 이해하기 쉽게 돈으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10원, 100원, 500원 단위의 동전만 사용한다. 만약 1000원을 내야 한다면 10원짜리 100개, 100원짜리 10개, 500원짜리 2개를 내서 지불할 수 있다. 물론 세 동전을 조합하여 1000원을 만들어 지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1001원을 내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1원이라는 동전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단위가 10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은 최소 10원 단위로 떨어져야 한다. 그것보다 작은 단위는 취급할 수가 없다. 연속적이라면 부르는 모든 금액을 동전으로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연은 최소 단위가 정해져 있어 계산할 수 있는 수가 제한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에너지, 위치, 운동량을 비롯한 물리량은 최소 단위를 지닌다. 최소 단위의 정수배에 해당하는 값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체가 연속적으로 매끄럽게 이동한다고 우리는 인지하지만 양자영역으로 확대해 들어가면 디지털 신호처럼 뚝뚝 끊어지며 이동한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고전적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움직임을 말한다. 불연속적 특성의 발견은 양자 역학을 태동했다.
양자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막스 플랑크다. 막스 플랑크는 흑체가 발산하는 복사 에너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복사 에너지란 온도를 지닌 물체가 내뿜는 전자기파를 말한다. 뜨거운 쇳물은 붉은색의 빛을 스스로 발산하는데 그것이 바로 복사 에너지다. 온도에 따라 발산하는 복사 에너지가 다른데 막스 플랑크는 그것을 계산하는 수식을 만드려고 했다.
기존의 물리학으로 저에너지 상태는 계산할 수 있었지만 고에너지 상태는 계산할 수 없었다. 기존의 공식으로 고에너지를 계산하면 무한대로 값이 발산해 버렸는데 이런 현상을 '자외선 파탄'이라고 부른다. 자외선 파탄을 해결하기 위해 막스 플랑크는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공식을 도출한다.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최소 단위의 정수배로 발산한다고 설명했더니 무한대로 발산하던 값이 유한한 값으로 제한되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막스 플랑크 자신도 이것은 흑체 에너지 문제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자연이 불연속적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고전역학을 옹호했다. 하지만 막스 플랑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양자 역학의 등장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서 아인슈타인은 빛이 양자화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금속판에 빛을 비추면 전자가 방출되는데, 고전 물리학으로는 빛의 강도가 충분히 세기만 하면 어느 주파수의 빛으로도 전자를 방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빛의 주파수가 일정한 값을 넘어야 전자가 방출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특정 에너지를 가진 불연속적인 양자로 작용하여, 이 양자가 금속 표면의 전자에 충분한 에너지를 제공할 때만 전자가 방출된다고 설명했다.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 오랜 기간 이어진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인슈타인이 빛이 입자성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하며 빛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지니는 존재라는 것을 밝혔다. 빛을 전자기파라고도 부르고 광자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를 통해 빛이 불연속적임을 밝혔고, 그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에너지도, 빛도 불연속적이었다. 닐스 보어는 여기에 위치도 불연속적임을 추가한다. 앞서 원자의 발견에서 잠깐 이야기했던 '양자도약'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원자는 중심에 원자핵이 있고 원자핵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전자의 운동이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듯 매끄럽게 움직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전자는 순간이동을 하며 운동했다. 전자는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 점프하듯이 궤도 사이를 거치지 않고 이동한다. 종착지를 가려면 당연히 중간지점을 거치기 마련인데 전자는 보법이 달랐다. 보어는 전자의 불연속적 움직임을 양자도약이라고 부르고 이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다.
정리해 보자. 불연속적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3가지를 살펴봤다. 막스 플랑크는 자외선 파탄 문제를 에너지가 불연속적임을 밝혀 해결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밝혀 광전효과를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닐스 보어는 전자의 불연속적 운동을 발견하였다. 이들의 발견은 세상이 연속적이라는 가정하에 쌓아 올린 고전물리학의 고전적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보수적인 과학자들은 이런 기이한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큰 충격에 빠졌다.
최근에는 자연이 불연속적이라는 사고가 확장되어 우주가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시뮬레이션 우주론'이 등장했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의 핵심은 이렇다. 게임에서 캐릭터의 이동을 보면 연속적인 것 같지만 픽셀 단위로 살펴보면 픽셀에서 다음 픽셀로 불연속적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전자가 정해진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듯이 모니터의 불빛은 픽셀에서만 반짝인다. 픽셀과 픽셀 사이의 경계에는 캐릭터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컴퓨터가 정보를 0과 1로 이루어진 불연속적 비트를 활용하는 것과 몹시 흡사하다. 관찰할 때 존재가 결정된다는 양자 역학적 현상도 게임에서 캐릭터가 보는 시야만 활성화되고 보이지 않는 곳은 계산하지 않는 현상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우리가 사는 우주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고 주장한다. 테슬라의 대표인 일론 머스크는 시뮬레이션 우주를 믿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워낙 괴짜라 사람들이 그의 인터뷰를 듣고 웃고 말았지만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일지 모른다는 그의 생각은 양자역학의 불연속적 특성에 기반한 논리적인 귀결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극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매트릭스>의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면, 영화 매트릭스는 주인공 네오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현실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네오는 모피어스라는 인물과 그의 동료들로부터 진짜 현실은 인류가 기계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모두 이 가상현실 속에 갇혀 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된다. 네오는 이 가상현실, 즉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싸우는 저항군에 합류하여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의 세계관이 공상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영화처럼 누군가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정말 우리가 사는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라면 이데아를 주장했던 플라톤이 영화 속 네오와 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은 고정된 현실 속에 무한한 가능성의 씨앗을 심어주며 경이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나는 양자역학을 배우며 깨달았다. 순수과학을 연구나 발명에만 쓰이는 세상과 단절된 마니아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은 단순히 과학자들 사이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연구하는 과정은 그렇게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이 밝혀내는 과학적 지식은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감화된 사람은 이전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본다. 새롭게 등장한 이론이 설득력을 지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사회에 통용되는 상식이 된다. 이런 식의 세계관 변화는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역사 공부를 하며 과거의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시대마다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신화적으로, 중세에는 종교적으로, 현대는 과학적으로 해석한다. 바람이 부는 현상을 보더라도 시대마다 해석이 다르다.
고대 그리스인은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가 자루에 갇혀있다가 나올 때 바람이 분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 정령이 있다고 믿었던 시기인 만큼 이런 식의 해석이 가장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중세에는 모든 것은 신의 의지로 해석되었다. 바람이 분 까닭은 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바람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그 목적을 알아내는 일은 사제들의 몫이었다.
현대인이라면 바람이 기압차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신부가 다가와 바람 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그 설득에 넘어갈 현대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 사람들이 무지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대마다 설득력을 얻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과거 사람들이 멍청해서 바람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과학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그런 식의 설명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논리와 관찰로 무장한 설득력 있는 학문이 등장하며 현대 사회에서 신화나 종교의 존재감이 줄어들고 있다.
세상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보인다. 바람을 바람의 신의 탈출로 볼 수도 있고, 유일신의 의지로 볼 수 도 있고, 기압차에 의한 현상으로 볼 수 도 있다.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믿음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아무리 바람이 기압차에 의해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해도 신화적 사고에 깊게 세뇌된 고대 그리스인은 바람의 신의 존재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현대의 설명 방식이 세상을 더 합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랑도 절망도 전쟁도 모두 신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던 관념에서 벗어날 것이고, 큰일이 생길 때면 신탁을 받으러 제사장을 찾던 행동도 줄어들 것이다. 생활양식이 전반적으로 바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사고의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삶의 변화는 사고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자연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고전역학에 입각한 사고방식을 지녔던 나는 양자역학을 접하고 생각의 변화를 경험했다. 세상은 내가 알던 것보다 더 섬세하고 복잡하며 동시에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풍경을 가리던 안개가 개는 듯한 기분이었다.
양자역학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나 없이 세상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관측하는 대로 세상이 결정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진정한 나'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이고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깨달음의 과정을 다음 편에서 본격적으로 나눠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