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이 질문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짧은 문장은 우주의 비밀을 푸는 열쇠와 같다. 원자가 세상의 기본 구성 요소라는 것은 오늘날 당연한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다. 과학사를 돌이켜 봤을 때 100년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으로 원자에 대한 탐구는 따끈따끈한 신생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짧다고 볼 수 있는 100년간 밝힌 과학적 사실은 우주에 대한 엄청난 관점의 변화를 시사한다.
나는 한 번 학생들과 함께 광물의 속성을 탐구하는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돌을 쪼개고 또 쪼개며, 그 안의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다. 교실은 금세 작은 돌조각들로 어수선해졌지만, 나는 그들이 계속 쪼개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보려는 그들의 시도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과학적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대상을 그 기본 구성 요소로 분해해 가는 이 방법은 마치 하나의 퍼즐을 작은 조각 하나하나로 나누어 전체 그림을 완성하려는 것과 같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사고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다. 그는 모든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하며, 만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던 당시의 세계관과는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만물의 근원(아르케)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불, 공기 등 기본 요소들이 그 후보로 거론되었고,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들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원자론의 개념은 이러한 탐구의 연장선에서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등장했다. 그는 사물을 무한히 쪼개다 보면 결국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기본 입자에 이르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이 입자를 그는 'atomos(쪼갤 수 없는 것)'라고 불렀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이후 거의 2,000년 동안 잊혔다가, 19세기 초 존 돌턴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돌턴은 만물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원자의 모양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어서 톰슨은 음극선 실험을 통해 원자의 내부 구조가 양전하로 채워진 구 속에 음전하를 띤 전자가 박혀 있는 '푸딩 모델'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원자의 전자 구성을 설명하려는 초기의 시도였다. 하지만 이는 곧 러더퍼드의 실험에 의해 수정되었다. 러더퍼드는 금박 실험을 통해 원자의 중심에 매우 무겁고 밀집된 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입자를 원자에 쏘았을 때, 대부분의 입자가 통과했지만 일부가 튕겨져 나오는 현상을 보며, 러더퍼드는 마치 얇은 종이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알이 튕겨져 나온 것처럼 놀랐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원자의 중심에 원자핵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고, 전자는 그 주위를 공전한다고 보았다.
러더퍼드의 모델을 바탕으로 닐스 보어는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불연속적인 궤도로 공전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양자 도약이라는 개념을 통해 양자역학의 서막을 열었다. 보어의 이론은 러더퍼드 모델의 한계를 보완하며, 원자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결론적으로,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운동하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역시 더 작은 쿼크라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소마다 양성자, 중성자, 전자의 수는 다르지만, 그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다.
원자는 언제, 어디서 만들어질까?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의 기원을 찾는 것은 곧 세상의 기원을 찾는 것과 같다. 이 여정은 언제나 그렇듯 빅뱅이라는 우주의 출발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빅뱅과 동시에 우주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만물을 이루는 기본 입자들이 탄생했다. 빅뱅 직후의 우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압력이 높아, 입자들이 정렬되지 않고 뒤섞여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끓고 있는 호박죽과도 같았다. 시간이 흐르며 우주는 팽창했고, 온도는 점차 낮아졌다. 원시 입자들은 결합하여 현재의 우주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로 변해갔다. 소립자들이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를 형성했고, 이러한 양성자는 주변을 떠돌던 전자와 만나 최초의 원자를 만들었다. 최초로 형성된 원자는 양성자 1개와 전자 1개로 이루어진 수소 원자였다. 현재 우주에서 수소는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우주가 성숙해지면서, 원자들은 서로 응집하여 성운이나 별과 같은 천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별의 중심부는 강력한 중력으로 인해 고온, 고압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 온도와 압력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수소 원자들이 융합하여 헬륨이 된다. 이 과정은 '핵융합'이라 불리며, 새로운 원소가 탄생하는 시작점이 된다. 수소가 고갈되면 별은 생성된 헬륨을 활용하여 더 무거운 원소인 탄소를 만들고, 같은 방식으로 산소, 네온, 마그네슘, 규소, 철을 생성한다. 이렇게 별은 마치 원소를 만드는 거대한 공장처럼 작동한다.
만약 원소 주기율표를 본 적이 있다면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이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별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새로운 원소를 만들어낸다. 별이 살아 있는 동안 내부에서는 강하게 잡아당기는 중력과 핵융합으로 발생하는 폭발력이 균형을 이루며 별은 구형의 모습을 유지한다. 하지만 별이 그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더 이상 핵융합을 할 수 없게 되고, 내부 중력에 의해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별은 폭발하며 그 생을 마감한다. 별이 이렇게 폭발하는 극적인 사건을 '초신성(supernova)'이라고 부른다. 초신성 폭발은 엄청난 열과 에너지를 방출하며, 그 과정에서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이 생성된다.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원소들은 우주를 떠돌며 중력에 이끌려 모여들고, 또 다른 천체를 형성하게 된다. 지구도 이런 과정으로 탄생했고, 지구 위에 사는 우리 또한 그 결과물이다. 불교에서는 '오온(색, 수, 상, 행, 식)'이 우연히 모여 '나'를 이룬다고 한다. 이 '나'는 실재하지 않는 우연의 산물이며, 일시적인 환상일 뿐이라는 '무아'를 주장한다. 원자의 일생을 추적해 보면, 불교의 가르침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별에서 태어난 원자들은 평생을 떠돌며 한때는 별이 되기도, 돌이 되기도,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죽으면 그 원자들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새로운 존재를 만든다. 원소의 여정을 통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사상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배운다. 현재의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이 과학적으로도 타당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별이라는 같은 고향에서 왔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출신 지역이나 국가, 민족, 혈통에 따라 서로를 구분하고, 그 출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출생지는 사람들 간에 유대감을 형성하고, 출신지가 같은 이들끼리의 결속을 강화하지만, 때로는 출신지가 다른 이들과 철저히 구분하게도 한다. 이러한 배타적 유대감은 때때로 갈등을 부추긴다.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했던 것처럼 참혹한 비극을 낳기도 한다.
인간의 몸은 약 37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세포는 약 100조 개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계산하면 우리를 이루는 원자의 수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다. 이 원자들은 별에서 시작된 긴 여행 끝에 지금 이 순간 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 그 원자들 각각은 저마다 화려한 모험담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찬란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우리에게 온 이 원자들이 볼 때, 고작 100년 남짓 살면서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하려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하찮게 보일지 생각해 보면 그저 민망할 뿐이다. 원자는 우리가 기원을 이해하고 서로 다른 존재들의 근원적 연결성을 깨닫기를 제안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별에서 시작된 존재들이다.
같은 우주에 속해 있다면, 동일한 물리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은하가 나타난다면, 과학자들은 그곳이 다른 우주일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논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다중우주 개념은 최근 영화의 단골 소재로 자주 등장하며, 대개 저 멀리 떨어진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영화와는 다르게 그 새로운 우주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바로 지금 우리 눈 앞에 놓여있는 원자는 새로운 우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원자는 고전역학의 법칙을 무시하고 그들만의 독특한 질서와 규칙을 지녔다. 이런 면에서 원자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물리 법칙을 발견하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우주와도 같다.
원자의 세계를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의 영역은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단순히 작고 단단한 알갱이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우주의 가능성이 펼쳐지고 있었다.
양자 세계에서는 행성처럼 보이는 입자가 궤도와 궤도 사이를 '순간이동' 하듯 이동하고, 시공간이 뒤틀려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자기력을 무시하는 기묘한 힘이 작용하며, 무작위로 터지는 폭죽처럼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모든 가능성이 뒤엉켜 있는 이 양자 세계는 마치 또 다른 우주처럼 그 신비를 품고 있다.
원자 속에는 무한히 작은 우주가 존재하며, 그곳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법칙과 비밀이 숨어 있다. 이 작은 소우주를 탐구할 때마다 우리는 마치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처럼 경이로운 발견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곳은 우주보다 더 낯설고, 더 깊고, 더 복잡한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 무수히 존재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원자 속 소우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경계를 넘어 새로운 물리 법칙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규칙을 재고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우주를 바라보게 하는 도전이자 모험이다.
과학 유튜브 채널 '석군의 비밀서랍장'은 "우리는 시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거부감을 갖는다"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큰 산 너머에 괴물이 있다고 믿어 그 너머를 탐험하지 않았고, 저 멀리 바다 끝에는 절벽이 있다고 생각해 그쪽으로 향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은 항상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품어 왔다. 인간은 큰 산을 넘고 미지의 대륙을 발견하며 원시 부족들은 새로운 땅으로 뻗어나갔다. 또한 바다 끝까지 항해하여 절벽이 아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구형 지구의 개념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던 분자, 원자, 전자 같은 미시 세계의 존재를 밝혀내면서 인간은 미지의 영역을 끊임없이 탐험해 왔다. 이는 인간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들이 실은 가장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원자의 발견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는 지금껏 인간이 보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발견이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한 극적인 경험이었다. 원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순간 과학계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출발한 양자역학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세상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게 된다. 원자의 발견은 그 시작에 불과했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한때 과학자들은 세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연속적이고 무한하게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원자라는 개념은 그들의 상상 너머에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작은 입자가 모여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볼츠만이 자신의 원자론을 주장했을 때 그조차도 동료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한계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종종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와 비밀을 이미 다 깨달았다고 자만하는 것이다. 원자가 발견되기 전의 과학자들처럼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이 가장 큰 착각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쉽게 갇혀버린다. 더 젊거나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익숙한 사고방식에 머무르려 한다. 그러나 원자의 발견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다르다. 겸손함 없이 우리는 결코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고 진정한 깨달음에 다가갈 수 없다. 원자는 늘 우리 곁에 있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은 우리의 시야가 그만큼 좁았기 때문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앎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질문하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 아직 이해되지 않은 것들이 이 우주에는 무한히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손함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