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비밀상자
누구나 하나쯤 비밀 상자를 가지고 있다. 비밀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본인 외에는 아무도 존재를 알지 못하는 그런 상자 말이다. 그리고 주인조차도 상자를 잘 들여다보지 않지만 막상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는 좀 그런 상자.
아들은 아직 비밀 상자 같은 것이 없어 보인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을 짐작하기도 어렵고 어디에 모셔두지도 않는다. 대신 집 전체를 자기만의 상자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까마귀처럼 어딘가에서 주운, 구매한, 만든 물건들을 집 여기저기에 둔다. 그리고 그것들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의 비밀상자에 든 물건처럼 그제야 만지작거리고 또다시 어딘가에 둔다. 그러고는 한참을 방치해 둔다. 그래서 또 버려도 되냐고 물으면 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
늘 집안이 어지럽고 너저분해 보이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정도 내려놓게 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날을 잡고 정리를 한다. 그날도 갑자기 정리신이 내려온 날이었는데 하필 아들이 자는 시간이었다. 우리 부부는 팔을 걷어붙이고 집안 곳곳에 영역 표시를 해놓은 아들의 물건들을 싹 정리했다. 다음날 아들은 달라진 집에 관심이 없었고 우리 부부도 그때만 해도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뒤, 아들은 어떤 장난감을 계속해서 찾았다. 한창 놀던 장난감이었는데 거의 몇 개월을 쳐다도 안 보길래 버렸는데 갑자기 어디에서 꽂혔는지 계속해서 찾아댔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장난감앓이는 멈추지 않았다. 다른 장난감이나 다른 놀이로 달래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다시 사야 했다.
그 후 나와 아내는 아들의 물건을 좀 더 소중히 다뤄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방법은 확연히 틀렸다. 아내는 아들과 함께 돌멩이 하나, 유치원에서 만든 조잡한 색종이 모형들까지 물어보면서 버렸고 당연히 아들의 물건은 거의 버리지 못했다. 아들은 물어볼 때마다 대답은 뒷전이고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나 장난감을 만지작 거렸다. 성과는 있었다. 아들의 물건들을 아들 방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아들은 눈앞에서 물건들이 옮겨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별 말은 없었다.
나는 좀 달랐다. 누군가의 비밀상자를 건드릴 마음은 없었지만 아들의 비밀상자는 집 전체였기 때문에 비밀 상자 주민으로서 상자 주인의 횡포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리고 아내처럼 아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보며 99%를 보존해야 하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버리기 시작했다.
장난감 같은 오래 보존해도 되는 것들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다시 사게 되면 그만한 에너지, 돈 낭비가 없으니까. 대신 조잡한 뽑기, 사은품 장난감들은 아들 모르게 주머니에 넣었다가 휴지통으로 가서 몰래 버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나 돌, 정체 모를 것들은 당연히 쓰레기통행이었다. 신중해야 했다. 돌멩이 하나라도 걸리면 아들에게 반려 동물을 버린 사람 마냥 취급당하기 때문에 절대 비밀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집은 깔끔해졌다. 오래간만에 진짜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소확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심부름을 시켜도 기분 내키는 데로 하던 녀석이 웬일로 쓰레기를 버리러 다용도실의 휴지통으로 간 것이다. 아들이 물건 한 움큼을 쥐고 우리 부부에게로 와서 왜 쓰레기통에 있냐고 물으면서 나의 범행이 들통났다. 아들은 진짜 쓰레기와 아빠가 생각하는 쓰레기가 뒤섞인 것들을 이미 다 꺼내서 다용도실을 뒤집어 놓은 상태였다.
아내의 차가운 시선이 내 얼굴을 때렸고 난 일단 아들에게 설명했다. 청소를 하다 보니 모르고 버린 것 같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손으로 힘주어 부러뜨린 것들을 보면서 아들은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왜 쓰레기통에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아내와 아들이 같은 마음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내 범행은 멈추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아내의 방법에 따라주기로 했다.
"가지고 놀 거야? 아니면 필요 없어?"
아들은 꽤 대답을 잘한다. 하지만 어린이의 여린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아무렇게나 만든 나무젓가락, 색종이 조합 작품도 아들의 기억에서 말끔히 사라져야 버릴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만든, 만진 기억이 있는 물건은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듯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도 부모님이 계속해서 물어대니 금방 지쳐버린다. 장난감 1박스도 정리하기 전에 상황 종료. 아내도 결정권자가 답답했는지 좀 더 물어보았지만 아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 하는 아내를 뒤로 하고 난 깔끔하게 물러섰다. 사실 내 범행은 멈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들킨 이후로 나는 좀 더 치밀해졌다. 분리수거에 맞춰 아들의 잡동사니를 버리거나 라면봉지 같은 것이 생기면 그 안에 아들의 잡동사니를 같이 넣어 쓰레기봉투에 버리는 식이었다. 벌써 몇 달째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으나 문제는 없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분리수거에 적극적이니 아내가 더 만족했으리라.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잔잔한 수면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가 수면 아래서 하는 행동을. 우리 가족은 모른다. 너저분해 보일 법한 아들의 방이 딱 보기 좋게 너저분한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