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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혼 Dec 08. 2021

아버지를 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들이 일찍 자는 바람에 시간이 생겨서 영화를 보았다. 이리저리 고르다가 '와스프 네트워크'라는 쿠바 스파이들에 대한 영화를 찾았다. 내용은 특별한 게 없었지만 라틴계 배우들이 낯익어서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실화 바탕이다 보니 조금 더 몰입이 되었다.


(스포 주의)


 여러 배우들이 나오는데 주된 인물 중에 비행기를 몰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군인이 있다. 그는 어린 딸과 아내가 있지만 미국 교도소에서 장기 복역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맡은 임무를 해낸다. 영화에서는 그런 상황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그날따라 마음이 쓰였다.


 내가 처한 상황과 그가 처한 상황은 같은 점이 거의 없지만, 가족이 있는 아버지라는 작은 공통점이 마음을 흔들었다. 과연 나는 어떤 원대한 목적을 위해 우리 가족을 희생할 수 있을까, 그러고도 모자라서 가족을 더 희생하여 십여 년간 감옥에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의 위기에서 모든 사람이 비슷한 처지라면 나도 지금과 다르게 좀 더 가족을 희생하려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의 위협이 있거나 오랜 기간 가족과 생이별해야 하는 조건이 붙는다면 역시나 가족을 선택하려 했을 것이다.


 그 군인도 고민이 많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가족보다 나라를 택했고, 장기복역을 택하며 가족보다 남겨질 동료들을 선택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로선 그의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가족을 대신할 만한 값어치 있는 행동이 무엇일 될 수 있을지 찾기 어렵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육아와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은 여전히 힘들어서 가끔씩 배역을 던져버리고 싶은데, 영화 속 인물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고 가족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그가 가족을 포기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 그의 신념이 부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 한 마리에도 열광하는 아들처럼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딘가에 열정을 쏟아붓고자 노력하고 쿠바의 군인들처럼 하나의 목적 아래 뭉칠 수 있는 집단을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가족 말고는 어떤 것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세상을 순수하게 바라보기 힘들다. 그 군인도 나라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동시에 그의 신념에 걸맞은 행동이라고 생각되어 움직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상관이 내린 명령도 또 다른 윗사람의 지시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의 어떤 생각이 녹아들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는 업무를 부여받는다 해도 그 업무가 100%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지, 나라를 위해 일하지만 자기 잇속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지도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여러 사람의 사사로운 잇속이 깃든 일들은 가족의 가치에 견줄 수 없다. 

 

 반면, 가족은 나에게 남편의 역할을 바라고 아들은 나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바란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거나 타인의 주문에 의해서 행동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나만이 그녀의 남편이 될 수 있고 내 아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이 이상 순수하게 나를 요구하는 존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어떤 이념이나 가치에 매료되어 열정적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선대 인물들의 희생을 생각한다면 누군가는 또 희생을 해야 하고, 내가 열정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우리 가족의 숭고한 가치가 변질되지 않도록 아내와 아들이 내게 준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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