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디자인 여행 둘째 날, 마츠야 긴자 백화점에서
둘째 날 아침 일정으로 숙소 근처의 이토야 긴자 본점에 방문했다. 평소 문구류에 관심이 있어 일본의 문구류 디자인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7층에는 일본의 종이 전문 브랜드 '타케오'가 입점해 있어 다양한 종이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토야 7층 타케오에서 목적 없이 방대한 종류의 종이들을 접하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 느긋하게 구경하진 못했지만 종이를 컬러, 쓰임새, 특성을 기준으로 분류해둔 것이 인상 깊었다. 일본에서 접한 대부분의 인쇄물 퀄리티가 훌륭했는데, 이곳에 방문해 보니 간접적으로나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음 방문 때에는 타케오의 본점과 또 다른 분점 아오야마점에도 방문해 느긋하게 종이들을 관찰하고 구매해보고 싶다.
이토야에서의 엄청난 소비를 예상했지만, 이거다 싶은 물건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근처의 이토야 분점에서 발견한 'MD paper' 제품들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MD paper는 종이 자체의 매력과 필기감을 중시하는 노트 전문 브랜드로, 프린트 면적은 최소화하고 폰트가 아닌 손글씨를 사용한 디자인으로 MD paper의 브랜드 철학을 심플하지만 묵직하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종이 노트를 이것저것 사고 끝까지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브랜드를 발견한 것에 의미를 두자, 생각하며 브로슈어만 챙겨 나왔는데, 여행 마지막 날 숙소 근처 Loft에서 MD paper제품을 다시 발견했을 땐 결국 구매하고 말았다.)
한국에 돌아와 구매한 MD paper 제품이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어 MD paper에서 2020년 다이어리를 구매하고자 검색을 했다.
MD paper diary 페이지 http://www.midori-yti.co.kr/md/products/mddiary/
개인적으로 뭔가를 달성하기 위해 중,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나는 언젠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플래너를 디자인해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가 있다.
학교 과제로 다이어리를 디자인하기 위해 시장에 나와있는 다양한 다이어리들을 조사하며 직접 사용해보기도 하고, '시간 관리의 달인', '플래너의 달인'같은 책들을 참고하여 나름 유용한 플래너를 만들어 보고자 시도한 적도 있었다.
처음 md paper 다이어리의 먼슬리 페이지 레이아웃을 보고 나는 감탄했다. 내가 지향했던 플래너 디자인의 방향과는 결이 달랐지만 md paper의 다이어리라면 반드시 이 레이아웃이어야만 했다. 그것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캐치한 md paper의 디자인이 '내가 본 다이어리 중에서 최고'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재밌는 사실은 나는 다이어리를 구매하지 않았고, 다이어리의 레이아웃을 내가 구매한 md paper 노트에 그려 사용하고 있다. 내년에는 꼭 구매할 예정 :)
둘째 날 점심은 이토야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의 '아코메야'라는 가게에서 해결했다. 아코메야는 일본 각지의 유명한 쌀을 모아 판매하는 '쌀가게'브랜드로 그 외에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상품들과 아코메야에서 셀렉한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한다. 식료품뿐만 아니라 식기, 의류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상품들을 판매하기 때문에 볼거리가 많았다. (아코메야 자체 생산 제품으로 추정되는) 세련된 패키지 디자인이 사람들의 구매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으나, '제품'이 아닌 '잘 브랜딩 된 패키지 디자인'의 어필은 다소 공허한 외침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구매로 이어지진 않았다. 아코메야에서 셀렉한 제품 중 'merippa'라는 룸 슈즈 브랜드 제품들은 보자마자 결제를 완료하고 집에서 이 제품을 신고 다니는 나를 상상하게 될 정도로 너무 귀엽고 유니크했다. 내 방이 이 제품에 조금 더 어울렸다면 분명 이 제품을 구매했을 것이다.
아코메야에서 10분 정도 걸어서 마쓰야 긴자 백화점에 도착했다. 당시에는 비가 와서 건물 사진을 못 찍었는데 셋째 날 밤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마쓰야 백화점의 모습이 멋져서 찍었던 사진을 첨부한다.
나는 마쓰야 긴자 백화점에 도착해 곧장 7층으로 향했다. 1일 차에 잠깐 언급됐던, 일본 디자인협회에서 선정한 '굿 디자인' 제품이 판매되는 곳이다. 또한 일본 디자인협회의 회원이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에 의해 리디자인 되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이진 못했지만, 백화점 내의 사인시스템이나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았을 법한 곳들을 살펴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당시에는 개인 기록용으로 사진을 찍은 터라 매장 전체 모습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예상보다 넓은 공간은 아니었는데, 제품들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참 적절한 규모의 공간이었고 굿 디자인 제품들을 모아둔 곳이기 때문일까, 매장의 전체적인 인테리어가 '투명'하고 '가까웠다'. 여기서 투명함이라 함은, 물질적 투명, 또는 투명/불투명의 디스플레이 컨셉 같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지만 인식 불가능한 '뺌'에 가까웠다. 물질적 투명함도 있었다, 매장의 범위를 알리는 '기능'을 하면서 내부의 '굿 디자인'제품들을 매장 밖에서도 그대로 보여주는, 투명한 벽이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가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백화점 내에 위치한 매장이지만 쇼윈도 같은 '선택된 환영'은 없었다.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닌, 무엇이든 보려 하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실재' 뿐이었다.
이곳 매장 옆에는 디자인 관련 전시가 소규모로 항상 진행되는데, 내가 방문한 날짜에는 하필 다음 전시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굉장히 슬펐다...)
이곳에서 사지 않은 제품이 (작년 겨울에 방문했음에도) 이 글을 작성하는 지금까지도 아른거린다. 그깟 돈 몇 푼 아낀다고 이렇게 정신적으로 고통받다니... 이런 게 바로 자본과 물질적 가치를 초월한 '굿 디자인'인 건가..? 오늘도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굿 디자인'을 조금이나마 실감해본다.
그 제품은 A4용지를 고정해주는 나무판이었다. 손에 잡히는 감각이 굉장히 견고했고, 아름다운 나무의 결과 색상을 그대로 살렸으며, 무엇보다 제품의 주요 기능인 용지 고정용 파츠의 디테일이 완벽했다. 강력한 자석이 부착된 나무 파츠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기능과 쓰임에 충실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자석을 누를 때 느껴지는 무게감마저 완벽하다고 느껴졌다. 이 제품을 회상하다 문득 후카사와 나오토와 재스퍼 모리슨의 책 'Super Normal'중에서 마음속에 새겨두었던 문장이 떠올라 첨부한다.
'개인의 창조적 자아보다 제품 자체를 앞세우려는 동기. 말하자면 창조적 도약이 아니라 진화적 순서를 밟는 것이다. 창조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적 노력을 제품의 시각적 측면에 덜 쓰는 대신, 자기 역할 및 환경과 균형을 이루는 제품을 만드는데 더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한 장씩 뜯어서 사용하는 메모장인데, 앞 뒷면을 제외한 4면이 각기 다른 컬러로 칠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제 21_21 디자인 사이트에서 디자이너들이 메모장을 활용하던 것이 떠올라 이것을 구매하면 디자인을 더 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구매했다. 종이의 질감과 옆면 컬러를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구매한 제품은 후카사와 나오토가 제품 디자인을 담당한 브랜드 'siwa'의 종이 가방이다. 진열대에서 이 제품을 보고 호기심이 갔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직원분께서 다가와 일본 전통지를 가공해 만든 제품으로 비에 강하다고 설명해주셨다. 전통 종이로 만들어진 가볍고 강한 가방을 추구하는 브랜드, 부드러운 종이의 잔잔하게 구겨진 질감이 가방의 포인트가 되는 것이 마음에 들어 구매했다. 브랜드에 관심이 가서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더 많은 제품들을 구경해볼 겸 검색하다가 후카사와 나오토가 제품 디자인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디자이너의 책을 통해 디자인 철학을 접하고 나서 그의 디자인을 일상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좀처럼 드문 경험이었다.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siwa 홈페이지 https://siwa.jp
이후엔 '도큐 플라자 긴자'에 있는 siwa매장을 방문하고, 시부야의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시보네 아오야마'를 구경한 다음 캣스트리트의 구제 숍들을 구경했다.
마지막 일정으로 오모테산도 힐즈에 있는 현대 셀렉트 리사이클 숍 'pass the baton'에 방문했다. pass the baton은 몹시 애용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그렇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그런 물건을 판매하는 리사이클 숍이다. 휴학 동안 인턴으로 일했던 디자인 스튜디오의 대표님이 출장 동안 수집한 종이 인쇄물들을 가져와 보여주시곤 했는데, 그중에 눈에띈 것이 pass the baton의 인쇄물들이었다. 가게의 약도가 담긴 명함 사이즈의 작은 홍보물이었지만 인쇄 퀄리티나 네이밍, 로고 디자인이 재미있어서 무얼 하는 곳인지 호기심이 들어 웹사이트를 방문했었다.
https://www.pass-the-baton.com/about/
pass the baton이 지향하는 바가 다소 감성적이기 때문이었을까, 매장 내 물건들은 자유분방하게 (다소 정신 산만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때문에 상품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것이 불편했다. 공간에 비해 진열된 물건의 양도 너무 많았다. pass the baton 웹사이트 소개글에서는 하나하나 소중한 이야기와 개인의 문화가 담긴 물건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매장에서의 경험은 공간을 가득 채운 '구제 상품 무더기'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다가왔다.
이런 것들을 보면, 디자인이라는 것은 유기적이어야 한다. 디자인에 흥미를 가지고 매장에 방문했지만, 결국 디자인 때문에 발길을 돌린다. 웹사이트에서의 경험과 매장에서의 경험 사이의 괴리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브랜드 이미지를 가차 없이 깎아내렸다.
나는 어제오늘의 여파로 발에 감각이 없어졌다. 이 날도 비가 꽤나 쏟아졌다. 버스를 잘못 타서 시간을 왕창 버리기도 했다. 오모테산도 힐즈의 스타벅스에서 거짓말 조금 보태 소주잔 만한 크기의 차를 한잔 시켜놓고 영수증을 정리하며 둘째 날 일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