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레터
블라인드 레터[Blind letter] : 수취인 불명의 편지. 모두에게 혹은 아무도 아닌 이에게 씁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무더위가 사그라드는 날입니다. 불길처럼 날뛰던 열기 대신 땀을 식히는 바람이 피부에 닿아요. 더 이상 밤은 짧지 않고 낮은 무표정하게 스쳐갑니다. 아마 당신이 그러했듯, 저는 오늘도 누군가와 만나 말을 주고받았고요. 계절이 오가는 와중에 나눈 이야기는 짧은 감상을 남겼죠.
저는 모두가 시를 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요. 어스름한 저녁을 함께 걸으며, 어깨에 묻은 벚꽃잎을 털어주며, 동네 술집에서 낡은 맥주잔을 부딪치면서 마주한 사람에게 얼마든지 가슴에 심을 이정표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순간을 만드는 시구도 오가는 감정도 무한에 가깝죠.
하나 분명한 것은 듣는 사람의 공감과 몰입이 꼭 필요하다는 것. 이것은 오롯이 말하는 사람에게서 출발합니다. 더 정확히는 마주한 사람의 마음 옆에 내 마음을 나란히 놓으려는 태도라고 할까요. 함께 나눈 시공간과 감정에 대한 것을 말하되 이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겠다는 무의식, 함부로 이해하려 드는 대신 손과 어깨를 내미는 것으로 족하다는 의식이 동반되면 됩니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시는 미문(美文)과 같은 말이 아니니까요.
오늘 만난 그 사람의 말은 제게 시가 되지 못했어요. 차마 피지 못하고 봉오리째 말라버린 꽃 같았지요. 듣고 있는 내가 아니라 내게서 추출한 몇 개의 정보를 가지고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에게 닿을 말 같았습니다. 긴긴 그 말을 들으면서 어쩐지 처참한 표정이 자꾸 비집고 나와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어요.
만약 당신과 함께 했다면 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그저 흐르고 흐르는 날에 물결을 일으키는 돌을 놓을 수 있었을까요?
생각을 하다 보니 그냥, 아득해지네요.
당신이 자주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문득 편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