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전야의 산책

마음이 휩쓸려 날아가기 전에 기억할 것

by 이경

블라인드 레터[Blind letter] : 수취인 불명의 편지. 모두에게 혹은 아무도 아닌 이에게 씁니다.




오늘은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먼 곳에서부터 태풍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졌거든요. 창문 너머 파란 하늘과 흰 구름에 붉은빛이 돌고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것을 보다가 흰 저녁달이 생각나 신발을 신고 말았지요.


저는 집에서 나와 천변을 따라 걸었습니다. 계곡처럼 돌이 듬성듬성 높인 물길은 고르게 다듬어진 도보 옆에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처럼 머리칼을 헝클었지만 상관없었어요. 높은 습도에 끈적해진 피부를 시원하게 말릴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습니다. 하늘은 집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더 크게 번져 있어서 고개를 쳐들고 시선을 멀리하며 걸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 때는 이 곳을 지나며 끝을 생각했던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요.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제가 지금의 나이가 된다는 것이 영 오지 않을 미래처럼 느껴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제 작고 견고한 세상에는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불량 생산된 부품처럼 어디에도 꼭 맞지 않고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하루하루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어떤 날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한참을 그 천변에 서 있었습니다. 정비되지 않았던 그 시절의 하천에는 탁한 물만 가득했고 악취를 풍겼지요. 해가 지려는 시간, 저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색을 보며 저는 하천 끝에 있는 강을 떠올렸습니다. 자주 보았던 건물 중에 가장 높은 건물이 어디인지 헤아리다가 가방에 빈 종이가 있는지도 생각했어요. 익숙한 얼굴이 한데 모여 우는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생각은 물보다 빠르게 흐르고 저는 거기에 빠진 것처럼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어디야, 집이야? 얼른 갈 테니까 같이 저녁 먹자.

얼마나 서있었는지 몰랐지만 뒤를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짧은 통화 내용에 저는 거의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너무 작고 사소한 순간이 모든 것을 등 뒤에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줬지요. 금세 축축해진 얼굴을 닦으며 생각했어요. 원하는 때에 죽을 수 없다면 원하는 형태로라도 죽자고.


어차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만 있는데 하나가 아니라면 남는 것은 다른 하나뿐이니까요. 죽음을 목전에 앞둔 순간이 되었을 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도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라는 생각 대신 ‘이렇게 더 살고 싶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자고. 그 보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렇게 살다 죽어서 다행이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요. 그러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구름은 그때도 부드럽고 포근한 색깔이었습니다. 걷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흰 저녁달이 살짝 드러난 것만이 달랐지요. 시간은 흘렀고 달은 여러 번 사라졌다 다시 뜨곤 했습니다. 흘러간 시간이 적지는 않지만 아직도 원하는 형태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아요.


다만 그러는 동안 발견할 것도 있었지요. 구름이 함부로 뭉개졌다 풀어지며 밤하늘에 녹아드는 것은 태풍이 오기 직전에 유난히 더 잘 보인다는 것, 태풍이 다 지나가고 난 후에는 하늘이 훨씬 더 높고 아득하게 넓어져서 달도 잘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당신에게도 태풍이 다가오고 있을까요? 함께 있다면 따뜻한 저녁을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나란히 달도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조금만 믿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