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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Jul 10. 2023

미완의 핫케이크

IMF에 대한 편지, 이경

    유희 씨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새삼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웬만한 것들은 잘 잊고 까마득해지는데 어떤 옛 기억들은 지나치게 선명해진다는 것입니다. 고작 서른몇 살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20년이 넘은 일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최근 몇 년 간 잊는 일을 무척이나 잘 해온걸요. 일주일 전의 일은 까마득하고 한 달 전의 일과 두어 달 전의 일은 일시가 불분명합니다. 유년기의 일은 그림 동화책의 어느 장면처럼 떠올리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해가 쏟아지는 풍경처럼 선명합니다.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기간은 1997년 12월 3일부터 2001년 8월 23일까지였다고 합니다. 저에게도 그때는 어느 순간부터는 절대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되는 그런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한 살의 여름, 저의 학교 생활은 5~6명으로 이뤄진 조원들과 모여 앉아 수업을 듣고 같이 활동을 하는 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오전 급식으로 매일 나오던 우유를 돌아가면서 챙겨준다든가, 교실 뒤편 게시판을 꾸미는 것을 조별로 함께 한다든가 하는 것이요. 아마 무언가를 함께 하면서 협동심과 배려심 같은 것을 챙기게 하는 목적이었겠지요. 방학 숙제에도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4학년 여름, 과정 과목의 가정 학습 과제로 나온 것이 조원들과 함께 요리를 완성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같은 조원이던 아이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가깝게는 걸어서 5분, 멀게는 버스를 타고 20분도 넘게 걸리는 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저희 집은 그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고요. 제가 속했던 조는 학교에서 집이 가장 가까웠던 A의 집에서 팬케이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팬에 버터를 떼서 넣고 우유와 팬케이크 가루 섞은 것을 부어 굽기만 하면 끝나는 요리인 데다 약간의 과일과 우유를 곁들이면 근사해 보이기도 하니까요. 모든 재료는 A의 엄마가 미리 사다 주셨다고 했습니다. 재료비를 조금씩 모아 A에게 건넸지만, A는 엄마가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며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빈손으로 과제를 받은 주의 금요일 수업을 끝마치고 곧장 A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A는 당시 동네에 새로 생긴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벽면에는 흰 바탕에 연두색을 더하고 아파트 이름을 멋들어진 로고처럼 그려 넣은 곳이었죠. 아파트 입구 반대편에는 커다란 슈퍼마켓과 어린이 놀이방이 포함된 음식점 등이 붙어있어서 지금처럼 주상복합 건물이 흔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이목을 끄는 구조기도 했습니다. 반 아이들도 그 아파트를 다들 알고 있었을 정도니까요.


    맞벌이 부부의 외동딸이었던 A는 엄마가 냉장고에 재료와 간식을 넣어두고 갔다고, 어떻게 하는지는 자기가 다 설명을 들었다며 씩씩하게 앞장섰습니다. 입구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에 내려 현관까지 졸졸 따라갔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A가 열쇠를 찾지 못했던 것이죠. 옷 주머니와 가방까지 모두 다 털었지만 열쇠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초등학생들은 휴대폰을 갖는 것이 평범하지 않았던 시절, A는 당황했는지 부모님의 직장 전화번호도 떠올리지 못해 공중전화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터덜터덜 걸어 나와 아파트 안의 놀이터에 저마다 걸터앉았습니다.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집으로 가자는 쪽으로 흘렀지요. 각자 갖고 있는 돈을 모으면 재료를 최소한으로 살 수는 있었거든요. 저는 그 자리가 급속도로 불편해져서 모래만 발로 툭툭 차기 시작했습니다. A의 집 다음으로 가까운 곳은 저희 집이었지만 선뜻 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저희 집 부엌은 초등학생 아이들 셋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였고 거실은 다섯이 앉으면 꽉 찰만큼 좁았습니다.


    열 한 살짜리의 작은 마음으로는 신식 아파트를 보고 온 아이들을 데리고 가파른 오르막길과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집을 보여주기가 싫었습니다. 게다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 엄마가 내어줄 간식도, 무언가 사다 줄 돈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탁이 없어서 재료를 준비하거나 만든 음식을 먹을 때 바닥에 상을 펴야 하는 것도 싫었고요.


    저는 끝까지 우리 집에서는 안될 것 같다고 말했고 더위에 지치고 김이 샌 아이들은 과제를 다음 주로 미루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저마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 집 자체는 IMF 시절 전에도 똑같았는데, 여유는 더 없어졌습니다. 아빠는 동업자들과 매일 돌보았던 회사 문을 닫고 굳은 표정으로 집에 틀어박혔습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할머니와 부모님이 싸우기도 했지요. 그 상황에도 제 몸은 눈치도 없이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안 그래도 좁은 집은 더 쪼그라들기 바쁜 것처럼 느껴지던 때입니다.      


    아직도 제가 걸터앉았던 새 시소와 애꿎은 발길질에 흩어지던 고운 모래가 기억납니다. 하릴없이 몸보다 작은 마음으로 저는 남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이내 교복을 입는 시절로 흘러갔습니다.


    그 이후 집안 사정도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본격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지요. 너무나 사소하고 타성에 젖은 기억이지만 어쩌겠어요. 모두에게 일어난다고 해서 개인에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지는 않잖습니까. 다만 비극이 이렇게 심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편지를 쓰며 새삼스레 복기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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