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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담 Jan 06. 2020

1/6_부정적인 사람은 되고 싶진 않지만 오늘, 힘들어

매일매일 일기 쓰기 프로젝트(5/356)

  부-웅. 진동이 울려서 퍼뜩 깼다. 허겁지겁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하니 9시 11분이었다. 

  "너 오늘 오후 근무니?"

 직장 동기 언니한테 카톡이 온 참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앞구르기 하면서 봐도 확실히 지각인 시각이다. 휘청휘청 일어나 옷을 입는다. 내 오만 부산에 동거인이 덩달아 일어나 무슨 일인지 묻는다. 내가 패닉에 빠져서 허둥거리자 깨워줬어야 했다며 동거인도 짐짓 울상이다. 늦잠엔 피로에 좋다는 간 영양제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맞춘 알람도 하나도 못 들었고, 어제 자기 전에 챙겨둔 짐들도 잊어버린 채 뛰쳐나왔다. 

 택시를 바로 잡아탄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머릿속을 샅샅이 뒤진다. 어젯밤 솔직히 2시 즈음에 잠들긴 했지만 알람을 못 들을 정도로 피곤하진 않았다. 그 전날도 주말이라 푹 잤기 때문이다. 새해 목표가 지각하지 않기였는데 그게 일주일 만에 초전박살 나다니. 연초라 의욕이 충만히 잠이 들었는데 오히려 이렇게 파! 워! 지각할 줄은 전혀 몰랐다. 

 다행히 회사는 차로 10분 거리로 매우 가깝다. 벌써 저기에 내릴 곳이 보인다. 성급한 마음에 안전벨트도 먼저 풀어버리고 내릴 채비를 한다. 그런데 갑자기 택시 아저씨한테 전화가 온다. "어~ 나 여기 어딘데" 아저씨의 통화소리에 "저 여기서 내려야 해요" 소리는 묻혀버린다. 내가 내려야 하는 횡단보도를 지나버린다. 다급히 다시 소리를 친다.  "아저씨 저 내려주세요!" 아저씨가 급정거로 차를 세운다. 다행히 횡단보도에서 수미터 가량 밖에 지나지 않았다. 

 계산을 하고 차 문을 여는데 눈 앞에 형형색색의 쓰레기 봉지들이 펼쳐진다. 아 하필이면 세워도 여기에 세워! 속으로 불만을 삼키면서 내리는데 퐁당 소리가 들린다. 퐁당? 아주 불길하다. 고개를 숙여보니 익숙한 것이 갓길에 고여있는 시커먼 물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내 핸드폰이다. 3분의 2가 물에 잠긴 채로 나에게만 들리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것은 곧 내 비명으로 이어진다. 갤럭시면서 삼성 페이도 안 되고, C타입이면서 무선충전도 안 되고, 이름에 '프로'씩이나 붙었으면서 방수도 안 되는 모질이같은 게 내 핸드폰이다. 가뜩이나 액정도 깨져있는데 안에서 아주 홍수가 났으리라.

 그러나 나는 시간이 없다. 쓰레기 물이든 똥물이든 간에 건져내기도 시간이 부족하다. 떨어뜨린 내가 모질이지 뭐. 참담한 심정을 속으로 삭히며 정문으로 뛰어들어간다. 출근 시간 9시 38분. 오늘은 아주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온다. 지각 사유서라도 작성해야 하나 눈치 보며 빌빌 거리다 드디어 숨통이 트인다. 내가 불쌍했는지 매일 은거하는 게 일인 동거인이 친히 외식하자며 물어온다. 회사 근처 대학가에서 쌀국수를 먹기로 하고 시간이 어서 흐르길 기다린다. 정각이 됐다. 그러나 아무도 퇴근하지 않는다. 누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지각한 주제에 가장 먼저 퇴근하는 염치없는 자가 될 수 없으니 빨리 누구든 퇴근해! 설상가상으로 동거인이 거의 도착했다고 한다. 다시 등줄기로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6시 반이 되었다. 회사를 뛰쳐나간다. 하필 폭이 좁은 치마를 입어 속도가 안 난다. 추운 빗속에서 코딱지만 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을까? 아님 식당에서 메뉴도 못 시키고 눈치만 보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당혹스러울 동거인의 얼굴이 어른거려 죄책감이 들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식당 문을 열 즈음엔 거의 오뉴월 개처럼 헥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식당엔 삼삼오오 식객들이 몰려 있을 뿐 동거인이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에 다시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본다. 배가 자주 아프곤 하는 동거인이 화장실에 갔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식당의 화장실은 식당을 나와 건물의 다른 입구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다녀오는 데 오래 걸릴 것이다. 혹은 악천후에서 기다리다 화가 나서 가버렸나? 그건 아닐 것이다. 아니여야만 한다. 
 일단은 식당을 나와 기다려본다. 침수돼서 꺼놓은 핸드폰을 켜야 하나? 연락을 할 수도 없고, 내가 몇 시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답답하고 무력한 기분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녀 좁은 인도를 차지하고 있는 내가 너무 민폐 같다. 도대체 어디에 있지? 그렇지만 일단 기다리기로 한다. 동거인도 충분히 오래 나를 기다렸을 것이므로.


 아니다. 안 되겠다. 속으로 아주 천천히 세기 시작한 숫자가 500을 넘어가는 데 근처에 아는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고민 끝에 핸드폰을 켠다. 작동이 안 되면 어떡하지? 액정에는 물이 고여 있으나 천만다행으로 터치가 먹힌다. 7시가 조금 넘었다. 동거인에게 카톡이 와있다. 아직 안 끝났어? 어디냐고 물으니 근처 동전 노래방이라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멀리서 달려오는 동거인이 보인다. 화가 나서 자연스럽게 언성이 높아진다. 왜 약속 장소에 있지 않았냐며, 내가 연락하기 힘든 상황이지 않았냐고 따진다. 이야길 들어보니 동거인은 내가 카톡을 읽지 않아 아직까지 퇴근을 못한 줄 알고 있었다고. 업무 시간 중간에 잠깐 연락한 게 있어 폰을 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도 어디 다른데 가면 말을 해줬어야지. 섭섭함에 눈물이 났다. 창피하고 억울했다.

 쌀국수는 죄가 없다. 저자세로 조곤조곤 달래는 동거인을 보니 조금 진정되어 식당에 들어왔다. 나는 좀생이처럼 내 메뉴를 거의 나눠주지 않고 우걱우걱 먹었다. 일단 배가 차고 나니 찬바람에 발갛게 된 그 사람의 뺨이 보였고 패딩에 흐르는 빗물이 보였다. 인두겁 속에 감정과 허기만 있다니 스스로가 짐승같이 느껴졌다. 사실 오늘 벌어진 모든 일들은 따지고 보면 전부 내 잘못 아닌가. 늦잠을 자지 않았다면 핸드폰도 멀쩡했을 것이고, 퇴근도 잘했을 것이고, 이 사람과 엇갈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미노는 완벽했다. 다만 틀린 방향으로 넘어졌을 뿐. 좀생이는 국물을 조금 남겨주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식후 기분전환 삼아 로또를 사 가기로 했다. 나는 수동, 그 사람은 자동. 조금 아쉬워서 즉석복권도 한 장씩 긁었다. 동거인만 500원에 두 번 연달아 당첨되었다. 이젠 그런 것쯤이야 웃어넘길 정도로 기분이 많이 풀렸다. 그리고 가게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시내버스가 막 옆 차도로 지나갔다. 물보라가 허리까지 나를 덮쳤다. 쓰면서도 너무 어이가 없군.  나는 그런 장면은 만화나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다. 동거인도 그랬다고 한다. 당연히 그런 모습이 직접 되어 본 경험이야 있겠는가. 이젠 화도 안 나고 그냥 킬킬 웃음이 나왔다. 그래, 더 나쁠 일이 있겠는가? 정말 나쁜 하루가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줘야지! 그리고 종장에는 동거인이 고마운 반전의 말 한마디를 남겨주었다.

 "오늘 하루 액땜한 운이 다 로또로 가겠네!"

 그래, 로또나 거하게 됐으면 좋겠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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