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담 Mar 31. 2020

3/30_봄볕에 나를 말리며

매일매일 일기 쓰기 프로젝트(11/365)

  3월이 끝나간다. 회사는 제안서 제출을 위한 막바지 단계에 돌입했다. 여러 사업을 2월부터 준비해왔는데 안타깝게도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 이번 제안서가 마무리돼도 당분간 괜찮은 사업이 더 뜰 때까지 여기저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할 테다.   

 중소기업에서는 한탕도 당연히 좋지만 어쨌든 꾸준히 일이 들어오는 게 중요하니까. 공들인 기획안이 엎어져도 계속 칼을 갈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 시국에 야근해가며 제출한 용역 사업을 따내지 못한 건은 당분간은 조금 속이 쓰릴 것 같다.

 제안서를 쓰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은 이 제안서가 과연 최고 결정자가 보기에 어떻겠냐는 것이다. 내가 쓴 문장, 내가 그린 도표가 끝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문서를 이어가려니 참 쉽지가 않다. 그렇게 써간 초안도 결국 회의 때만 되면 대표님한테서 뭉텅 뭉텅 잘려나가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채워지는데, 항상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저런 기똥찬 생각을 못했을까, 저런 시야를 가지지 못했을까 한탄스럽다. 이건 내 한계가 분명한 일이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 와중에도 성장을 했다는 점이다. 작년에 썼었던 문서를 참고하려고 파일을 열었는데 뒤로 자빠질 뻔했다. 어찌나 문장이 거칠고 서툰지, ppt는 또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그때도 분명 대표님께 서너 번씩 퇴짜를 맞아서 나온 결과물이었는데 말이다.  

 확실히 그때보단 나아졌다. 문장 연결이나 단어 선택을 더 잘할 수 있게 됐다. ppt도 기업용 흉내는 내게 된 것 같다. 어떤 부분에 퇴짜를 맞아도 한두 번 만에 어떤 걸 원하시는지 대충 알아먹고 수정한다.(이건 사실 대표님이 어느 정도 포기하신 걸지도 모르지만^^;) 남들 눈엔 티끌만 한 작은 성취 일지는 몰라도 일하는 보람이란 게 결국 별 거겠냐는 건방진 생각도 든다. 하하.

 그래도 가끔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여기엔 다그치는 대표님도 없고 쌀쌀맞은 동료도 없는데 괜히 풀이 죽고 눈치 보게 될 때가 있다. 이건 타고난 기질이라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제안서의 콩만 한 글씨를 보고 있다 보면 초점이 스륵 풀리면서 딴생각의 세계로 빠지는... 건 그냥 졸린 걸까? 하하. 대신 나름대로 해결책도 찾는 중이다.

 요즘 같은 날씨는 무조건 햇볕 보기다. 옥상이 열려있어서 자주 일광욕을 하러 나간다. 1시간 제안서 쓰다 볕쬐고, 2시간 도표 그리다 바람 쐬고. 최근엔 미세먼지도 없어서 낮은 건물들 사이로 산이 보이는데 그 풍경이 너무너무 좋다.

 평상시의 산은 커다란 면일뿐이었다. 형체만 겨우 보이는 먼 곳의 테두리. 그러나 지금은 브로콜리 잎을 샅샅이 훑는 것처럼 우둘투둘한 양감이나 녹갈색 색감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그 위에 얹어진 청량하고 깨끗한 하늘까지. 왜 고대 위인들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수행했는지 점점 이해가 된다.

 옥상에서 나를 널어놓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불안함도, 자책감도, 부끄러움도. 항상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고, 그 생각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선명하게 표현도 못해서 괴로웠는데 그런 내 모습도 바람에 다 날아간다. 모쪼록 편안한 봄볕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1/29_마음이 힘들거나, 몸이 힘들거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