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6
00은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상기됐다. 잘 익은 토마토 수준을 넘어 검붉은 와인빛에 가까웠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푹 숙였다. 땀으로 반질반질한 목덜미와 미처 감추지 못한 귓바퀴까지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A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적막만이 흘렀다.
“... 도... 요?”
“그래요. 믿기 힘드실 거예요. 하지만 진짭니다...”
여전히 고개를 푹 파묻은 채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렸다.
“...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하아-...”
고통에 찬 긴 한숨 끝에 00은 간신히 얼굴을 들었다. 땀으로 범벅인 얼굴은 허탈과 고통, 혼란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그게 말이죠...”
00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건의 시작은 대략 4시간 전이었다.
“오늘은 저녁 먹고 들어올 거예요!”
집을 나서며 00은 집에 계신 부모님께 미리 안부를 전했다. 00은 군대 전역 후 바로 대학에 복학하고 취업까지 한 번에 한 운이 좋은 남자였다. 직장이 집 근처여서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하며 집에 생활비를 보태는 것으로 독립을 퉁 쳤다. 00의 부모님은 그가 독립해서 살아보기를 권했지만 누나가 먼저 독립하고 몇 년 안 돼서 다시 부모님 집으로 밀고 들어온 터였다. 밖에 나가 살면 다 돈이고 고생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00이 보기에도 누나가 독립해 살면서 금전 문제로 시달린 상황을 지켜본지라 독립은 가능하면 결혼하면 하려고 미뤄두었다. 자가나 자차보다 두둑한 통장이 우선순위에 있다는 사실을 누나를 보며 몇 번이나 되새겼다. 00의 집은 방임적 교육관이 확실한 가정이었고 집에서 엄한 건 유일하게 00의 누나였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어딜 가든 뭘 하던 성인이니 알아서 하라는 주의이지만, 누나는 달랐다. 00이 안부를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마주쳤을 때 인생의 불행을 간접적으로 맛볼 수 있었다.
“다녀올게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머리를 매만진 뒤,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며칠 전, 00은 예상치 못한 메시지를 받았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대화를 마지막으로 깜깜무소식이 된 A의 메신저 메시지였다.
[우리 만나요. 토요일 점심 어때요? 제가 살게요.]
00은 핸드폰 메신저 창을 다시 확인했다. 질리지도 않는지 몇 번을 읽고 또 반복해서 읽었다. 남자는 빤히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날이 더워서인지 여름날 특유의 설렘인지 묘하게 심박수가 빨라졌다. 아니면 긴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뭔가 해볼 수 있는 날이 왔기 때문일 지도. 00은 이번엔 늦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약속 장소는 00의 집에서 30분 거리였다. 오늘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싶던 그는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
“00로 가주세요.”
택시는 유유히 출발했다. 00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풍경은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약속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심박수가 빨라졌다. 00은 입이 타서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택시비를 계산하고 약속 장소 근처에 내렸다. 갑자기 00은 현실감이 확 와닿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은 아직 1시간이나 남은 상황이었다. 걸어가면 5분 거리였고, 00은 일단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데이트하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구급차에 실려 갈 지경이었다. 우선 근처 가까운 약국부터 찾았다.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진정할 것 같았다.
“저...”
“네?”
낯선 기척에 00은 차갑게 돌아봤다. 처음 보는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길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요. 혹시 00이 어딘지 아세요?”
“아, 저쪽 길로 가셔서 쭉 직진하다 보면 오른쪽에 간판 보일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여자는 00을 쳐다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말과 다르게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얼굴을 빤히 보았다. 00은 자리를 뜨지 않는 여자가 꺼림칙해서 먼저 움직이려던 참이었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네?”
“눈빛이 참 맑고 안색이 깨끗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의 근거 없는 칭찬 공격에 00은 크게 당황했다. 티 내지 않고 최대한 빨리 자리를 피하려고 걸음을 옮겼다.
“죄송한데, 제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데 우유나 빵 좀 사주실 수 있을까요?”
00은 발걸음을 멈췄다. 시선을 돌리니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00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뜬금없는 요청과 달리 여자는 요청에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00의 눈에 여자의 차림이 들어왔다. 키가 작고 통통한 여자는 어울리지 않는 짧은 커트 머리였다. 빳빳한 직모가 뿌리부터 붕붕 떴고 아래로 쏟아질 듯 머리숱이 많았다. 귀 옆으로 옆 라인을 따라 짧게 자른 것과 다르게 뒷머리만 길게 길러 뒷목을 덮었다. 얼굴엔 피부가 하얗게 각질이 일어나 얼굴부터 손까지 전체를 뒤덮었다. 위아래로 검은색 옷을 입었는데 간혹 군데군데 하얗게 일어난 피부가 떨어져 얼룩덜룩했다. 특히 손이 겹겹이 각질이 일어나 빨갛게 발진처럼 부풀어 핏기가 보였다. 00은 여자의 요청을 쉬이 무시하기 어려웠다. 시간은 아직 넉넉했다.
“... 예.”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하자, 여자는 씨익 웃었다. 돈을 벌기 시작한 후부터 꾸준히 자선단체에 기부를 해왔던 00은 어려운 행색의 여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선뜻 힘들게 번 돈도 내놓으면서 눈앞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일은 위선이었다. 오죽하면 낯선 사람한테 구걸할까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빵집이 보였다.
“저쪽에 파*바***가 있어요. 가시죠.”
“아유~ 네! 감사합니다!”
여자는 무척 기뻐하며 00을 따라갔다.
“드시고 싶은 거 고르세요.”
빵집을 한 바퀴 쭉 돌아본 여자는 250ml 흰 우유 한 팩과 비닐로 포장한 소보로빵을 골랐다. 계산을 마치고 여자가 우유와 빵을 먹을 수 있도록 빵집 내 테이블에 앉았다.
“편하게 드세요.”
살짝 눈치를 보던 여자는 우유 팩을 뜯어 한 모금 마셨다. 이어서 빵 봉지를 듣고 소보로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천천히 우물우물 씹었다. 시선은 여전히 00에게 고정한 채였다. 00은 여자의 시선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싸늘한 기분이 들어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맛있게 드세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잠시만요!”
여자는 다급하게 00의 옷자락을 잡았다.
“제가 정말 힘들어서 그런데, 잠깐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황당했다. 화들짝 놀란 00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손을 쳐냈다.
“살면서 정말 힘든 일이 많았어요. 어릴 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고...”
여자는 대꾸할 새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혹스러웠지만 반면에 여자가 측은하기도 했다. 흘끗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40분 이상 남았다. 적어도 여자가 염치가 있다면 20분 정도면 이야기가 끝날 거라고 판단한 00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00이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하자 씨익 웃었다.
“집안에 우환이 많아 가족사가 복잡했어요. 저희 어머니가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병원 신세를 오래 졌는데... 아버지도 가정에 관심이 없어서 자식들이 모두 힘들었죠. 그래서 공부도 제대로 못 마치고 저도 몸이 안 좋아서 병원도 자주 다녔어요.”
00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혹시 몸이 아프거나 하지 않으세요?”
“네?”
“기운이 참 맑고 좋으세요.”
“아뇨, 건강은 뭐...”
“이런 분이 보통 조상 덕이 있으세요.”
“예...? 뭐요?”
“조상님께서 돌봐주시는 자손이라 정성을 들여야 해요.”
“... 네?”
여자는 폭주 기관차처럼 혼자 말을 이어갔다. 00은 점점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빠져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저희 집도 조상님께 정성 드리고 나서 다 좋아졌어요. 저도 지금은 마음도 편해지고 몸도 전보다 훨씬 좋아졌고요.”
00은 다시 여자의 행색을 살폈다.
“정성 들이는 건 제가 전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상차림하고 음식하고 준비하는 비용만 주시면...”
“아니요, 관심 없습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이상한 느낌에 자리를 뜨려 하니 여자는 다시 00의 옷자락을 콱 움켜잡았다.
“관심 있어야죠!!!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어요?!!! 여기서 저를 만난 게 천운이에요!!!! 당신은 조상님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00의 뒤통수에 아무 말이나 던졌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00은 식은땀이 났다. 우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됐어요!! 관심 없다니까요!!”
00은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빵집 문을 거칠게 열었다. 여자는 눈을 희번뜩이며 00의 뒤를 쫓아 달렸다.
“조상님께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제 말 무시하면 큰일 난다고요!!!!”
여자가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빵집 직원과 손님, 길거리 행인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00은 당황해서 하늘이 노래졌다.
“아니, 내가 관심이 없다고요!!!!!”
겁에 질린 00은 덩달아 달리기 시작했다. 문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여름 공기가 후욱 밀려왔다. 숨통을 죄였지만 00은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여자를 떼어내야 했다.
“온 집안 식구가 다 당신 때문에 죽어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조상님 무시해서 사고당해도 상관없냐고요!!!!”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여자는 고래고래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쫓아왔고, 00은 대꾸를 시도했으나 여자가 전혀 듣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자 곧 포기했다.
“우리 집 조상님이면 식구들을 보호해도 모자랄 판국에 정성 안 들인다고 집구석 말아 드시겠어요?!!!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여자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쫓아왔다. 이 더운 여름날에 지치지도 않았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00의 뒤를 바싹 쫓았다. 벌써 번화가 근처 동네를 구석구석 몇 바퀴째 돈 상태였다. 00은 운동을 좋아해 자주 즐겼다. 일부러 몸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축구나 농구, 수영 등 해볼 수 있는 운동은 전부 취미 삼아 해 온 터라 체력에는 자신 있었다. 이 여자를 알기 전까지. 작고 통통한 체구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00은 곧 따라 잡힐 지경이었다.
“그만 좀 따라와요-!!!!!”
00은 절규했다. 얼마나 오래 도망쳤는지 자주 다닌 번화가에서 처음 보는 골목에 닿았다. 두 사람은 지쳐서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헉-! 헉-!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때 골목 사이 귀퉁이로 00의 시야에 목욕탕 간판이 들어왔다. 순간 00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여자가 제아무리 간이 크다 한들 쫓아오지 못할 남성들의 성역이 존재하는 법이다.
“헉-! 진짜 중요하다니까요!!!! 헉-! 6, 60만 원...! 헉-! 60만 원이면 제사상 차려 드릴게...! 헉-!”
간당간당 잡히기 일보 직전, 00은 남자 목욕탕으로 뛰어들었다.
짤-랑-!
“으-아-!!!”
유리 미닫이문 상단에 달아놓은 종이 울렸다. 일단 남자 목욕탕 안으로 들어온 00은 여자가 따라올지도 몰라서 문 안쪽에 버티고 섰다.
“이봐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당신 진짜 그러다가 죽는다니까?!!!”
문 앞엔 포기를 모르는 여자가 매달려 문을 두드렸다. 00은 도통 포기를 모르는 여자의 집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여자가 포기하기 전까지 나갈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5분이었다.
“아니, 이 여자가 뭐 하는 짓이야?”
숨을 고르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밖에서 중년 남성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말이야!”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 목욕탕 문이 벌컥 열렸다.
“이건 또 뭐야?”
“아, 죄, 죄송합니다!”
문 앞을 막고 서 있던 00은 크게 당황해서 물러섰다. 살짝 문 뒤를 살펴보았다. 여자는 포기한 건지 사라졌다.
“휴우-”
00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두 손으로 땀을 쓸어 닦아내었다.
“쯧쯧-”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남자 목욕탕 카운터에 앉은 중년의 남성과 조금 전에 들어온 남자가 00을 위아래로 훑으며 한심하게 보았다. 놀라서 눈이 땡그란 00는 자신의 행색을 살폈다. 뭐가 문제인지 몰라 카운터에 앉은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중년의 남성은 00의 발을 흘겨보았다.
“아..”
급하게 달려 들어오느라 신발을 신은 채였다. 00은 깜짝 놀라 서둘러 신발을 벗어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카운터의 중년 남성에게 다가갔다.
“죄송한데, 제가 아주 급박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여기 잠깐만 앉아 있다가 가도 될까요?”
남자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00을 위아래로 훑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얼마 남지 않아 반쯤 대머리인 남자는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구겼다. 누운 대문자 S자의 하얀 눈썹이 양쪽에 나란히 서 남자의 나이가 더 지긋해 보였다. 허락을 받은 00은 카운터 옆 매점 앞에 마련한 휴게 공간의 의자에 앉았다. 정사각형 바닥을 벽에 딱 붙여 그 위에 목판 좌석을 얹은 저렴한 의자였다. 엉덩이가 딱딱하고 불편했지만 지금 나갔다가는 그 여자를 마주칠 것 같았다. 00은 슬슬 불안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약속 시간 5분 전이었다. 불안에 동공이 흔들리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약속 장소까지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핸드폰으로 지도를 확인했다. 얼마나 달린 건지 약속 장소에서 목욕탕까지 직선거리로 3.2km였다. 도망치며 골목마다 지나친 걸 떠올린 00은 절망했다.
삑- 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핸드폰 배터리까지 말썽이었다. 분명 자기 전에 충전되는 걸 확인했는데 얼마나 썼다고 8%밖에 남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확인했지만 변함없었다. 얼른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일단 확실히 여자가 쫓아오지 않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00은 깊게 심호흡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불길하게 긴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