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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브 Sep 25. 2021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

혼돈과 혼란의 시대와 그 원인에 대한 분석

혼돈과 혼란이란 우리의 인지가능한 범위를 넘어 불확실성이 극대화 되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매우 큰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능력에 기반한 근로소득의 의미보다 자산의 가치 상승에 의한 부의 축적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며 능력 배양이라는 예측가능함보다 금융상품이나 부동산 등의 예측 불가능함에 더욱 의존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강타, 그에 따른 여러가지 예상치 못한 사회적 현상들의 발생으로 나날이 골머리를 앓고 있고, 환경문제에 따른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지구종말론이 범람하여 우리의 불안감을 늘리고 있으며, 예상치 못한 성별, 연령, 진영 간의 갈등 들로 인해 통합이 어려워지고 출산율이 낮아져 향후 생산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늘 품으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그동안 기고만장 해왔다. 과학과 공학의 가파른 발전으로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 모두 가능할 것처럼 믿고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매우 견고히 쌓아왔으며,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신의 영역에 머지않아 곧 다다를 것이라 암묵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오죽 했으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지나친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우리의 전능한 영역에 침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세간의 커다란 쟁점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의 전능함이 이미 수준급이며 그 전능함의 산물의 능력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정도라는 인간존재 스스로에 대한 매우 높은 평가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의 한 작가는 지금까지의 인간의 발전을 매우 유의미 했으며 충분하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해결책 답안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이제 인간에게 문제 해결력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능력이며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만이 미래의 희망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나열한 문제와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이 과연 얼마나 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는가? 생명을 연장한 것을 제외하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은 경악스러울 만큼 제자리 걸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로, 그러나 마치 모든 것을 예측한다는 듯이 행동한다. 애초에 세계의 본질이 복잡계인 것을 망각한 채, 매 순간 우리의 처참한 인지범위로 가치판단을 해가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선택하며 그에 대한 합리화를 완벽하게 해나간다. 당신이 공부를 때에도, 주식 투자를 할 때에도,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의 계획을 세울 때에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도, 하다못해 담배를 태우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 말이다.



세계는 복잡계이며 애초에 복잡계란 인간에게는 혼란과 혼돈 그 자체이다. 인간의 인지 범위에 들어와 통제가능한 무언가가 되는 순간 그것은 복잡함이 아니라 단순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많은 복잡함, 즉 혼돈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어 통제가능한 범위에 넣기 위해 매일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화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우리가 많은 것들을 우리의 인지범위 안에 들어가는 개념으로 정립해 놓는 순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큰 복잡함이다. 때로는 우리가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속도보다 복잡성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더욱 빨라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도 한다. 아무 것도 모를 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영역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도 크게 와닿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새로 정리하고 규격화하고 통제범위안에 집어넣으려 할 수록 우리는 우리가 채우지 못하는 것들을 더욱 많이 발견함과 동시에 무지와 미지의 영역이 얼마나 큰지를 더욱 체감한다.




고등학생 시절, 20살이 되던 해에는 늘 가슴 벅차게 살아왔다. 그때의 인생의 힘듦이란 늘 극복가능한 것으로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벽에 부딪치면 나의 지식이 짧아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다면 내가 지식을 쌓아 그 이해도를 높이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내가 발전을 이룩하고 세상의 이치에 대한 이해와 식견을 넓혀 간다면 세상이 머지않아 나의 무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이 서점에서는 그 설렘을 감출 수 없었고, 공부를 할 때에는 고단하면서도 즐거웠으며 새로운 곳을 다니고 예술적 자극을 받을 때면 삶의 무게와 고통에도 그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좌절은 없었고 질주만 있었다. 열심히 사는 것이 곧 나의 혼돈의 영역을 줄여주고 결국 나를 평화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이 나의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해주었고 흥분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설렘과 벅참은 어린 아이의 특혜였다. 내 계획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외부로부터의 폭풍이 나를 넘어지게 하기도 했다. 그 폭풍들은 불가항력적인 것들이었고, 나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곳으로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불가항력적인 외부요인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더욱 가져야할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으며, 아는 것이 많아지고 식견이 넓어질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더욱 많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주변에서 받는 칭송도, 존중도 내게 찰나의 만족감을 줄 뿐 그 어떤 위안도 되지 못했다. 식견이 넓어지고 세상이 복잡계라는 것을 깨달아 갈수록, 이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죽음과 불확실성, 혼돈의 영역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깨달아 갈수록 나는 더욱 지혜로워졌고, 더욱 비탄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며, 내가 지금 갈망하는 것이 어느 순간에 내 손에 들어올지 모른다. 즉, 내 계획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무의미한 것인지 깨달아버린 것이다. 나는 분명 성공에 수렴하고 있다. 분명 내 능력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가파르게 발전해가고 있다. 사고와 지적능력도 스스로 과거와 완전히 다른사람이라 느낄만큼 발달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혼돈의 영역이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 자체가 혼돈이라는 깨달음만 더해갈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또한 즐기며 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고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포기할 수 없다. 이 행동은 세상의 본질이 혼돈이자 복잡계인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만 사실 내가 발전해가고 인지범위를 넓혀가며 스스로 변수를 늘리고 복잡함을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키운 것이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특히 그 식견의 향상이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동반할수록 우리는 기존에 혼돈이었던 영역을 앎과 인지가능한 영역으로 새롭게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그 자체를 더욱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자. 혼돈과 착각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나 자신과 남을 완벽히 객관화해서 바라보게 된다면 그 어리석음과 모순적 발상들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정말 기가 막히도록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해 착각하며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해 망상하고 동시에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해 객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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