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내 아파트 경로당 입구에 쪽지 하나가 붙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긴 여운을 주었다.
회원 여러분! 계절이 바뀌었읍니다.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경로당은 그를 찾는 사람들을 '회원'으로서 대하고 있었다. 동네의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라, 경로와 우대의 대상으로서 또는 일종의 관리의 대상으로서 '어르신들!'이 아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고객 또는 내규에 의거해 대우받는 정식 '회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계절이 바뀌었다니. 이 얼마나 운치 있고 긴 호흡을 가진 인사말인가. 단순한 이 사실의 기술은 분명 안부의 인사를 머금고 있었다. 날이 추워졌으니 몸을 안녕히 돌보시라는, '회원 여러분'의 진정한 안부를 걱정하는 짧지만 분명한 마음씨. 그리고 '읍니다'. '회원'들과 경로당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기호, 말투, 관습. 세상이 많이 바뀌고 세월이 많이 달라졌어도, 더 이상 우리들의 방식이 유효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우리끼리만은 알아들을 수 있는 그 단어로 이야기 하자는 은밀한 암호, 정겨운 감성.
그다음 문장,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라니. 누가 저렇게 정확하고 따뜻한 문장을 썼을까. 일단 문장이 굉장히 간결하다. 보통이라면,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라든가, '코로나 상황이 괜찮아지면' 정도로 구체적인 일정을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쪽지의 문장은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불확실한 기한을 함부로 약속하지 않았다. 그저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고만 한다. 아쉬울 만큼 간결하지만 결코 차갑지 않다. 그 마음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당장은 우리가 함께할 수 없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부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의 회원들이 이 길고 긴 차가운 시간들을 잘 견뎌내길 바라는, 조약돌을 쌓으며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호박엿을 대문에 붙여 내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붙길 바라는 그 가느다랗고 권력 없는 마음으로.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그 어느 날을 생각하며. 갑자기 달라진 낮과 밤의 기온을 염려하며.
과거 편지나 삐삐가 개인과 개인을 잇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었던 때가 떠올랐다. 개인 전화가 보급되기 이전,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 더 어긋나 있던 시절. 조금은 덜 구체적인 문장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이야기하던 시절. 확정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사정에 걸맞은 단어, 표현, 그리고 그를 염두에 둔 마음. '다음 답장이 올 때까지 부디 안녕히'. 초 단위의 연락을 주고받게 된 지금, 누리는 것이 많아진 만큼 잊힌 공백의 마음씨들. 서로를 생각하고 떠올리는 공간을 대신 다른 무언가에 자리를 내주고 난 지금, 저 공백을 가득 담은 문장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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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쪽지는 언제 어떤 목적으로 쓰였을까. 언제까지 거기에 붙어있을까. 계절이 바뀌었다는 건 여름을 말하는 걸까 겨울을 말하는 걸까. 그 쪽지를 뗄 수 있게 되는 그날은 언제쯤일까. 아니면 다른 쪽지로 대체될까. 회원들은 그때까지 안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