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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yner Jun 14. 2021

가벼운 나에 대한 부담

기획 일을 하다 보면 Draft 버전을 만들 때가 많다.

대부분은 전체 프로세스의 초입 부분에 만들어지는 초안 정도라,

단순히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지만,

때로는 이를 공유해야 할 때가 있다. 

아직 제대로 된 버전이 아니라는 의미로 Ghost Pack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선 해당 내용으로 Draft 버전을 만들어 공유드립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Rough 하게 작성하여 공유드립니다..

추가 Develop 하여 재공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받는 이 버전이 최종 버전, 혹은 1차 피드백 조차도 받지 않은 

아주 초기 버전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각종 문구들을 넣는다.


그 이면에 깔리는 심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주가 되는 마음은 

'이거 충분히 괜찮지 않다는 것 나도 아니까, 그 정도는 감안해서 생각해라. 

혹시나 이거에 대한 피드백을 주려거든(잔소리를 하려거든)

이 이후에 내가 얼마나 업그레이드해서 올지를 감안해서 해라,

그렇지 않고, 이 버전만으로 내 작업을, 아니 나를 의심한다면

당신은 내가 이렇게 똑똑히 명시해놓은 문구조차 읽지 않고 

나(내 작업물과 작업 수준을)를 섣불리 판단하려는 사람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정도의 자기 방어가 주를 이룬다. 


(혹은 '난 이 정도까지만 할 테니 이 이후 작업은 이제 당신이 좀 해라'와 같은

무언의 압박도 간혹 포함된다)


여하튼, 

이것이 초안임을 명시하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로서의 선제공격이다.

이는 자신 없는 얼굴에 대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상처들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내 얼굴이 못난 게 콤플렉스'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이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 생겨난 매너이기도 하지만,

나는 때때로 메일에서 이런 문구를 적고 있을 때

이게 과연 필요한 문장인가를 생각한다


이 문장은 누구를 위한 문장인가




당신을 위해 쓴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함이 아닌가



나는 왜 묻지도 않은 말을 미리 서둘러하려 하는가


이 정도면 적당히 알만한 사람들은 알 텐데

'초안'임을, 'Draft버전'을 'rough 하게' 작업한 것임을 명시하는 심리



나는 그것이

'가벼운 나에 대한 부담'이라 생각한다



너 생각보다 가벼운 사람이구나

너는 좀 더 깊이 생각할 줄 알았는데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를 놔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좋게 생각하면

그만큼 내가 가진 '많고 훌륭한' 생각들이 있는데, 

혹시나 '부족한 당신이',

아니 

'내가 나의 많은 + 훌륭함을 전달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으므로 당연하게도 그럴 수밖에 없을, 내가 부족하게 보일 수 있는 그 상황'에 대한 사전 대처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가볍게 보이는 것을 왜 그렇게 꺼려하는가를 생각한다면,

당연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멋짐을 충분히 설명할 시공간적 상황이 여의치 않았음과

그 어려움을 충분히 알고 있는 '역시 멋진' 나는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가벼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좀 더 가벼운 시작과 말투로

좀 더 보정 없는 직설과 직언으로

좀 더 어설픈 단어와 문장들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비단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어떤 자가 성찰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좀 더 light 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실험적인 문장들과 발상들과 시도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상의 나를 알건 모르건

그동안의 글들이 다소 '최종 버전'의 나를 표현하기 위해 쓰는 목적이 컸다면,

보다 많은 창작과 연습을 위해서는

light 한 나를 위한 자리도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브런치 플랫폼이 내게 준

작가라는 호칭과 발행이라는 작은 권한

여기에 묶여서

어설프거나 

초안쯤으로 여겨지는 글의 수준이나 발상들을

자가 검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나는

나를 군사독재의 언론 또는 그 붓과 펜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나를 울타리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가급적

Backspace 버튼을 누르지 않고

거듭하여 써 내려가는 문장들이

부디 나를 발전시킬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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