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yner Aug 04. 2021

짙은과 몽니

1.

마음을 다 보여줬던 너와는 다르게

지난 사랑에 겁을 잔뜩 먹은 나는 뒷걸음질만 쳤다


너는 다가오려 했지만

분명 언젠가 떠나갈 것이라 생각해 도망치기만 했다


같이 구름 걸터앉은 나무 바라보며

잔디밭에 누워 한쪽 귀로만 듣던

달콤한 노래들이 쓰디쓴 아픔이 되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아


분명 언젠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만 모른 척 지나가겠지

최선을 다한 넌 받아들이겠지만

서툴렀던 난 아직도 기적을 꿈꾼다


눈 마주치며 그땐 미안했었다고

용서해달라고 얘기하는 날

그때까지 잘 지내자 우리 우리


지금 생각해보면 그까짓 두려움

내가 바보 같았지 하며 솔직해질 자신 있으니

돌아오기만 하면 좋겠다


- [잘 지내자, 우리], 짙은



1-1.

언젠가 뜨거웠던 연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귓가에 어렴풋이 짙은의 이 노래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마디까지 갈 필요도 없다

'마음을 다 보여줬던 너와는 다르게'

첫마디부터 나는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


하고 싶은 말들은 너무 많았지만

그 첫마디를

다름 아닌 냉정한 자기 고백에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나를 다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했었나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순간 나는

이 세상에 없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가득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왜 그런 나에게 너는

모든 걸 다 보여주려고 했었나

너는 왜 나와 다르게 그렇게 행동했었나

너는 힘들지 않았나

내가 밉지도 않았나

내가 뻔히 다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너는 왜

너는 왜 그렇게 마음을 다 주었나

이 마음들이 느리고 낮은 짙은의 고백을 통해

나는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부족했던 시절의 자기를 하나씩 되돌아보며

사과를 건네는 '서툴렀던 나'는

더 이상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서툴렀던 때는 오래된 과거고

시간이 지나 용서를 구하는 때도 오래된 과거다

언젠가 다시 스칠 날도, 실현 여부를 떠나, 과거의 어느 때일 것이며

잘 지낼 것을 부탁하는 '그때' 마저도 이제는 과거의 완료 시점일 것만 같다



나의 사랑 이야기가

더 이상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오래된 과거완료와 과거의 뒤엉킨 실타래 같다는 사실을

나는 늘 떠올리고 만다



어쩌면 이제 내가 바라는 기적은,

서툴었던 내가 더 이상 서툴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좀 서툴었던 그때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2.

소년이 어른이 되어 사람을 알아갈 때에

뜻하지 않던 많은 요구와 거친 입술들


소년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갈 때에

하얀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지겠지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서글픈 추억들 중에 작은 조각이 되겠지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가네


미련한 나의 모습을 버릴 수만 있다면


나의 내일이 다가오면 소년의 꿈을 이뤄줄 작은 노래가 돼줄게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오늘도 미련 없이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네


- [소년이 어른이 되어], 몽니


2-1.

적당히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던 날에

친구네 대학 캠퍼스를 갈 일이 있었다

당시 친구가 잠시 단역으로 출연한 영상제에 초대된 것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해 친구들과 학관에서 밥을 먹고

영상제가 열리는 극장으로 향했다

줄지어 객석으로 향하는 동안

나의 마음이 다소 시렸던 기억이 난다


영상을 보기도 전에

분명히 나는 심리적으로 공허의 상태였다

그 전년도에 함께 재수를 준비했던 나와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원하는 곳에 입학한 친구의 학교에서 열렸던 영상제였기 때문이다


질투나 시기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당분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부적응 반응에 가까웠다

목표의 부재와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 자존감의 결여 같은 것들이

당시 불안했던 스물한 살 초반의 내 마음을 대부분 채우고 있었다



영상이 시작되고

등장한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또래였다

덕분에 주인공이었던 남자에게 어렵지 않게 나를 투영시킬 수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소년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며 마주하는 불안과 미성숙한 심리를

뮤직 비디오처럼 연출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몽니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주인공은 부족한 자기 옷장을 뒤적거리다

아빠 방으로 가서 제법 태가 나는 셔츠와 자켓을 걸쳐보기도 한다

몰래 차 키를 들고 나와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어보기도 하고

친구들이나 호감 가는 이성에게 연락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기대와는 다르게 풍요롭기보다는 빈곤하고 불완전하다


소년은 상황이 마음에 썩 들지 않지만

심지어 그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장면은 계속 바뀐다

몽니의 서늘한 목소리가 유난히 잘 어울렸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안정을 바라기에는 너무나 소원한 공허

외부의 냉정을 이야기하기엔 터무니없던 내부의 사정



예상치 못한 울림은 때로 준비된 마주침보다 타격이 크다

나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불안한 표정의 자화상과 마주해야 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몽니를 기억하게 한 이유일 것이다



그 후로도 이따금씩 그때 그 영상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린 마음으로 영상을 바라보던 내가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다

불안하고 침잠하던 그때의 나를 다시 마주한다면

괜찮다고, 좀 더 웃어도 된다고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