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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 Dec 16. 2021

게으르게 편안하게 슬기롭게

남편의 쉬는 날이 늘었다. 전염병 관련 조치라 일시적이겠지만 자그마치 주중에 삼 일을 집에 있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둘만의 시간이 생긴 건 오래간만인데 딱히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곧 휴가철인데 휴가 계획부터 짜야 할까? ‘도시의 플라뇌르 테마로 프랑스를 가자!' 하고 휴가 계획을 짰다가 맞이한 코로나 상황이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이로써 당분간 해외든 국내든 여행 계획은 접을 수밖에 없다. 변이 바이러스, 인종차별 등 걱정을 떨치고 그곳에 가려면 초등학생인 딸아이가 성인이 되는 때나 가능하려나.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내가 사는 마을인 내곡동은 아파트 단지이긴 하지만 고개를 들면 산이 보이는 자연 친화적인 곳이다. 구룡산, 대모산, 인릉산을 끼고 있으며 청계산이 코앞이다. 자전거 도로가 잘 구축된 마을이라 자전거만 탈 줄 안다면 마을 곳곳에 설치된 서울시 따릉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여의천에서 시작하는 천 길을 따라 한강까지도 달릴 수 있다. 이러한 환경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해서 시간을 보내보자. 

지척에 있는 청계산 등반을 계획할 수도 있지만, 우리 부부는 트래킹을 산책코스로 넣지 않는다. 힘을 많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등산객이 많이 오는 유명한 산이지만 우리에겐 그저 봄이 무르익었다 싶으면 진달래 능선 코스 한 번 오르고, 몸무게가 늘어난 것 같으면 땀 빼러 가고, 마지막으로 산에서 내려와 먹는 냉면 때문에 가는 곳이다. 일 년에 많아야 세 번 정도 간다. 대신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서초구립도서관인 내곡 도서관에 들러 입맛에 맞는 책을 몇 권 빌리는 것으로 산책을 시작한다. 남편은 주로 자기 계발서를 빌리고 난 신간 소설이나 딸아이랑 읽을 책을 빌린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5분 정도 더 걸어 청계산 지하철역 앞에 있는 스타벅스로 간다. 언제나 손님이 많은 카페라 들어가서 앉을 엄두는 못 내고 커피 두 잔과 샌드위치를 포장한다. 그리고 근처 공원의 나무 그늘을 찾아가 벤치의 먼지를 툭툭 털고 앉는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사람이 많은 점심시간 외출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초등학생 딸아이가 교육부 코로나 방역 지침으로 1학기 내내 오후반이 되어서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이 정확히 점심시간 포함해서 세 시간이 나온다. 짧은 시간이 아닌가 싶었는데 결론적으로 부부 둘만 있는 시간은 세 시간이 딱 좋은 것 같다. 게다가 주로 남편이 말을 하는 쪽이라 나는 귀를 활짝 열고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홀짝이거나 입 안 가득한 샌드위치를 음미하면 된다. 계발서 탐독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 예전보다 많이 느긋해진 남편의 모습에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잘 들어주려고 하는 편이다.  

여유로운 주중 산책도 꽃이 지고 장마와 더위가 찾아오며 예상대로 감흥이 떨어지는 지점에 왔다. 다행히도 우리는 미술 작품 감상을 좋아한다. 내곡동에서 차를 타고 나가면 30분 안쪽으로 도착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예술의전당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좋다. 항상 양질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곳이라 입맛에 맞는 전시를 보면 된다. 

인터넷으로 현재 열리고 있는 전시를 검색해보고 예약이 필요하면 진행하는 건 내 일이다. 남편은 일전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주문한 직접 디자인한 티셔츠를 입고 나간다. 이 와인색 티셔츠의 뒷면에는 플랑드르파 화가인 ‘피터르 브뤼헐’의 ‘농가의 혼례’가 소장처와 함께 프린트되어 있다. 티셔츠 앞 왼쪽 가슴께에는 작가 이름을 새겼다. 주 중 낮 시간이야말로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를 가장 여유롭게 볼 수 있는 황금 시간대이다. 한가롭게 작품을 실컷 보고 사진도 찍고 몇몇 영감을 주는 미술 작품을 찾아낸다. 기념품 가게에서 신중하게 전시 기념품을 고르고 미술관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전시 감상평을 나누는 때가 가장 만족스러운 시간이다. 남편과의 수다는 미술관에서 본 작품 몇 개에서 역사, 인물, 음악, 여행으로 가지를 뻗어 나간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영국 초상화 미술관 전시에서 본 작품 한 점이 인상에 남았다. 가수 ‘에드 시런’의 초상화였다. 수더분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수가 서려 있었다. 초상화 전시를 계기로 얼굴부터 알게 되어서 이번에 BTS와도 협업했다는 그의 음악을 이제는 운전할 때마다 틀어 놓게 되었다. 

마을에서 소소하게 시간을 채워간다. 그래도 마을을 벗어나고 서울을 벗어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틈틈이 파고든다. 조용히 집에서 지내야지 싶으면서도 ‘작년에도 참았는데 올해도 참아야 해? 호텔이라도 예약해서 놀다 오는 게 좋겠어!’ 하며 숙박 예약 창을 뒤지다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 금액에 놀라 창을 닫는다.

뚜렷한 휴가 계획 없이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급기야 여행을 위한 우리만의 비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빨간 머리 앤의 산책길’이라는 이름까지 짓고 지난주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갔을 때 시도해 보았다. 주차장에서 미술관 정문 쪽으로 올라가면 조각공원에 있는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노래하는 사람’을 먼저 지나게 되고 몇 개의 조각상을 거쳐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다. 이때 먼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한국어 간판이나 도로 표지판 등을 시야에서 쓱쓱 지워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다른 나라의 미술관 길을 걷는다고 상상한다. 일본 나오시마 현대미술관을 방문하는 길이야, 이건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돌벽이고 저기엔 ‘쿠사마 야요이’의 조각 작품이 있네. 시야를 살짝 좁히고 주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진짜 된다. 짧게는 몇 초 정도이지만 뇌가 잘만 속아주면 새로운 여행을 할 수 있다. 물론 여행지의 한계는 자명하다. 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을 상상하는 것은 전시장 안에서나 가능할까 앤이 아닌 이상 무리이다. 우리와 풍경이 비슷한 일본의 어느 미술관이니까 가능했던 것 같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둘이서 시간을 좀 더 보내며 마을을 산책하고 전시를 보고 한 끼 식사를 더 했을 뿐인데 대화의 소재가 마르지 않는다. 예상 밖이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일본 뉴스뿐만 아니라 역사 드라마까지 섭렵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남편이 보는 일본 관련 책을 읽게 되었고 일본 문화에 대해 궁금한 점도 많아졌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말수가 적은 나도 딸아이 교육 관련 이야기뿐만 아니라 대학 입시 시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술술 꺼내게 되었다.

둘이서의 이야깃거리가 많아지다 보니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도 좋겠지만 어쩌면 집에서도 휴가 기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으르고 편안하게, 주어진 자연환경을 즐기고 마을의 상권을 이용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전염병은 빨리 물러나 주었으면 한다. 루브르는 다시 한번 들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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