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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Dec 26. 2020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

부디 아프지 말고 안전하게 인생의 끝까지 달려가길 기도하는 영화

두 곳만 가보자. 그거면 돼.
출처: 영화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
“혼자서 전공 2년 치부터 치프 일까지 다 하잖아. 근데 걔는 티를 안내. 힘들 텐데. 투덜대고 짜증 내도 다 이해할 텐데 겨울이는 뚱할지언정 싫다고 도망가거나 투덜대질 않아.”

-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중 익준이 정원에게 하는 말-


가끔 어느 누구도 쉬이 신경 쓰고 눈치채지 못하는 점을 예리하게 알아채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볼 때, 사실은 그게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찾아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신부라는 꿈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겨울에게 호감이 있는 정원이 자꾸만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 때, 두 사람을 가장 옆에서 잘 지켜봐 왔던 익준이 위와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멋진 친구, 익준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익준’이라는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익준은 남들 앞에서는 항상 밝고 싹싹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특유의 에너지로 잘 극복하는 한 사람이어도 실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은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출처: 영화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

영화 속, 사랑하는 언니를 교통사고로 한 순간에 잃고서 그 아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바이올렛에게 핀치는 명랑하게 다가간다. 불안하게 다리 난간에 서 있던 그녀를 만난 이후로 자주 말을 걸고, 학교 과제인 ‘wandering project’ 파트너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곳곳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장소들로 모험을 가자고 먼저 손을 내민다. 처음에는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던 바이올렛도 점차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부모님을 비롯해 친구들 모두 먼발치에서 바이올렛의 슬픔을 위로할 뿐이었다. 이 아픈 마음은 도저히 나아지지가 않는데, 그만 잊어도 된다고 하거나 억지로 그 날의 사고를 꺼내려하지 않았다. 그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리고 핀치는 바이올렛처럼 슬픔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슬픔을 외면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면할 수 있도록 바이올렛 옆에서 도와준다. 바이올렛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할 즈음, 핀치는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우울증세가 갑작스럽게 심각해진다. 그의 잠적으로 바이올렛과의 오해는 점차 커져가는데, 뒤늦게 바이올렛이 그와의 추억의 장소로 핀치를 찾아가지만 남아있는 건 그의 옷가지와 그의 옷 주머니에서 나온 ‘your turn’이라 적힌 돌 하나뿐이었다.


‘your turn’의 무게감과 깊은 유대를 느낀다. 그 고작 작은 돌이 옷 주머니 안에서 우리에게 은근한 무게감을 짊어지게 한다. 그 무게란, 내가 직접 말로 꺼내기도 힘들 만큼 세상을 향하여 침묵할 때, 내가 너의 슬픔을 알아보고, 그렇게 다가와주었듯이 너도 그래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다. 나를 찾아와 주길, 나를 다시 살게 해 주길.


버지니아 울프의 책 구절을 인용해서 대화를 나누는 바이올렛과 핀치처럼 위로는 신나는 일로 슬픔의 감정을 덮으려 하거나 갖은 말로 애써 꺼내는 어려운 말들이 아니다. 그냥 주어진 것이면 충분하다. 그게 너와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 구절일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내가 위로받은 만큼 또 다른 이의 외로움과 슬픔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간다면 우리는 그렇게 한 발짝 더 유대하며 조금 더 슬픔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헤매는 사람들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삶을 만끽하는 것조차 어려운 게 바로 오늘날이 아닌가.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는 그런 밀레니얼 세대의 고민과 불안, 그리고 위안의 방식에 대해 진솔하게 풀어놓는다. 인생을 드넓게 펼쳐진 도로라고 생각하자. 그런 인생을 살다가 보면 길을 잘못 들어 헤맬 수도 있고, 가끔 빨리 달려가다 사고가 나기도 한다. 그러니 힘이 들면 도로 중간에서 잠시 멈추어도 된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심코 지나쳤던 나를 둘러싼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바라보자. 느려도 좋다. 부디 당신이 이 길을 안전하게 완주하길 바랄 뿐이다. 얼마든지 기다릴 마음으로.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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