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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Mar 08. 2021

<117편의 러브레터>

무너지지 않는 사랑의 힘을 증명하는 영화

당신을 위해 시를 썼어요.
출처: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

지독한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우리는 흔히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고 말한다. 사랑과 열병은 닮았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도 내가 들어있을까 간밤을 지새우듯 새벽마다 고열에 시달리며 가망을 바란다. 방심하는 순간 밀려오는 열기운처럼 사랑도 예상할 수 없이 순식간에 마음에 스며든다. 이 영화 속의 두 주인공 미클로시와 릴리는 그 사랑과 열병을 동시에 경험한다. 전쟁이 끝났을 무렵, 두 사람은 각자 병을 치료받기 위해 요양소에서 머무르며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서로에게 편지를 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해도 그들은 자유롭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역경의 시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전쟁의 상흔, 지울 수 없는 기억, 가족을 향한 그리움,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보통의 삶. 이 모든 열병을 끌어안은 두 사람은 다시 사랑하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약 3주가 흘렀을 때의 일이다.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의 해방도 잠시, 미클로시는 스웨덴의 한 요양소에서 폐질환으로 6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순간 결혼을 결심한다. 관청으로부터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헝가리 여성들의 명단을 받아온 미클로시는 117명의 모든 여성들에게 직접 편지를 쓴다. 오로지 사랑을 하기 위해서. 그는 몇몇 여인들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릴리라는 이름의 여인이 보낸 편지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들은 각자의 상황을 공유하고 서로의 고민거리를 들어주고, 조금씩 감정을 쌓아갔다. 그러나 병이 낫길 기도하고 편지가 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상이 마냥 설레이지는 않는다. 풋풋한 연애편지에 기분이 들뜨다가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현실은 그만 포기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 그 남자를 믿을 수 없다며 주변에서는 릴리를 말리고 미클로시는 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니 릴리에게 그만 작별을 고하라는 말들을 듣는다. 요양원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숱한 죽음을 목격한다. 병을 이기지 못해서 혹은 이 암담한 현실을 이기지 못해서. 미클로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한 번 믿어보려 한다. 그리고 2,000km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릴리를 만나기 위해 그는 발걸음을 옮긴다.



운명은 내가 얼마나 독한지를 몰라.
출처: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

이렇게 차근차근 미클로시와 릴리의 여정을 쌓아 올린 뒤에 마주하는 마지막 단 몇 분간의 결말은 입에서 짧은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117편의 러브레터>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인 <새벽의 열기>의 작가이자 감독인 피테르 가르도시의 부모님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거짓말 같은 인연과 기적이 모두 사실이었음에 우리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사랑의 힘을 한번 더 실감한다. 피테르 가르도시 감독은 실재하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이 호소력을 십분 활용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머니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카메라 시선 앞으로 빨간색과 초록색 리본으로 묶여있는 2개의 편지 꾸러미를 내민다.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던 그녀와 미클로시가 나눈 편지들이다. 관객은 1인칭 시점으로 어머니께서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교차하며 등장하는 흑백화면 속 과거의 이야기를 바깥에서 가만히 관찰한다. 여기서 과거의 시점을 흑백영화로 제작한 점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색이 하나 없는 공간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창백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도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해 흡입력 있게 주인공들의 사연에 빠져들게 만든다. 더욱이 놀라운 건 이 영화 속의 약 8분가량의 영상이 영화 촬영을 위해 연출된 것이 아닌 실제 영상이라는 점이다. 감독은 사전조사 중에 발견한 스웨덴 요양소에 있었던 홀로코스트 생존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그 영상들을 자신의 영화에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실현시켰다.(출처: 교보문고 팟캐스트 낭만서점)


요즈음엔, 내 몸에서 열이 조금만 느껴져도 예민해지곤 한다. 혹시 아픈 곳은 없는지 불안해지고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그리고 많은 후회를 했다. 바빠서, 혹은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무심코 다음으로 미뤄뒀던 일들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식사,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여행, 어느 평범한 날에 북적한 카페에서 오후 햇살을 만끽하는 일. 어쩌면 다음으로 미뤘던 바로 그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우리가 평소 외면하고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의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아마 미클로시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사랑을 갈망했던 건, 그리고 릴리가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된 이 사랑을 믿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잔인하고 험난한 역사를 지나오면서 그 누구보다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선택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시선은 정성스럽다. 즉, 미클로시와 릴리가 맺는 사랑의 결실을 통해 이 역사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생존자들의 지난 고통의 시간들까지도 가만히 끌어안는 것이다.


병의 차도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길 기다린다. 그 속절없는 기다림에 우리는 잠시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위기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 앞에서 우리가 무얼 망설일 필요가 있는 지를 깨닫는다.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는 그런 우리에게 코로나 시대의 사랑법을 내민다. 우리가 지금껏 열렬한 사랑을 열병에 빗대어 그 간절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이를 반대로 비틀어 이 열병을 사랑에 빗대어 보는 게 어떠하냐고. 우리 조금만 더 사랑에 기대어보자고.


*개봉 전 배급사 알토미디어(주) 측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로 관람 후 작성한 글입니다.

*2021년 3월 1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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