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런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ESIA Jan 21. 2022

<사일런스>

종교라는 이름으로 감히 가둬둘 수 없는 믿음의 크기를 보여주는 영화

눈을 뜨고 기도하게.
출처 : 영화 <사일런스>

이 영화는 17세기, 선교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가 사라진 페레이라 신부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자 개인 내면의 신앙으로의 여정이기도 하다. 풋내기 신부인 로드리게스와 가르페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해져 온 종교 탄압에 저항하고 절망하는 과정 속에서 신의 존재 의미와 스스로의 신념을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침묵(Silence)은 작품에서 크게 네 가지 정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먼저 영화 전반부의 분위기를 채우고 있는 침묵의 기운이다. 기치치로를 따라 우여곡절 끝에 일본 땅을 밟은 로드리게스와 가르페는 그리스도교를 신앙으로 삼고 있는 한 마을 사람들과 조우하게 된다. 밤안개로 둘러싸인 마을, 그들은 이노우에 무리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레 이동한다. 아무 배경음악도 깔리지 않은 채 침묵만으로 채워낸 장면들. 이는 보는 이 조차 절로 숨을 죽이게 한다. 숨소리 하나 새어 나갈까 두려운 침묵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 순간들이 마냥 적막하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몇 날 며칠을 고생했던 두 신부는 마을 사람들이 건네준 음식을 받아 들며 허기진 배를 급하게 채우려 한다. 이때, 옆에 있던 일본인 신자들은 당연한 듯이 식전 기도를 올린다. 그 모습에 두 신부는 눈치를 보며 뒤늦게 기도를 올린다. 신부로서 복음을 전파한다기에는 어딘가 엉성한 두 사람과 언뜻 신부들보다도 더 바람직한 종교인처럼 보이는 일본인 신자들의 대비는 다소 어두운 영화 배경에도 실소케 하는 부분이다. 이 같은 아이러니는 이후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기치치로의 고발로 인해 이노우에 파에게 끌려간 로드리게스는 코 앞까지 당도한 죽음의 위기에서 여느 평범한 인간처럼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데 옆에 함께 끌려온 몇몇 일본인 신자들은 오히려 침착하게 말한다. 여기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바로 이것이 영화가 보여주는 두 번째 침묵이다. 참혹한 현실에서도 차분하게 죽음의 운명을 기다리는 신자들의 투철한 종교의식. 이 자들은 어찌도 이런 고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로드리게스는 그 침묵의 힘이 의문스럽고 혼란스럽다.

출처 : 영화 <사일런스>

그리하여, 세 번째 침묵은 바로 로드리게스 신부의 침묵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노우에의 잔인한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성화를 밟아도 되는 것인지, 이토록 신실한 신자들이 고통받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몇 번이나 배교하면서도 매번 죄를 사하여 달라고 찾아오는 기치치로를 과연 사랑으로 보살펴야 마땅한 것인지 로드리게스는 그 어떤 것에도 분명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는 신자들이 극진히 모시는 신부이기는 하지만 실상 한 번도 진정으로 종교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본 적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내면으로만 갈고닦아 왔던 신앙심의 실제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의심하고 또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이 침묵의 여정 속에서 그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과도 같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을 뒤집고 깨부수고, 그분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 힘을 다해 슬퍼하고 화를 낸 뒤에 얻을 수 있는 것이 그 어떠한 장애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믿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 신부의 침묵을 앞세워 인간의 맹신과 신념 사이를 가르고 있는 셈이다.


영화가 결정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지막 침묵은 예수의 침묵이다. 신은 왜 침묵하는가. 그것은 종교와 관련된 논쟁에 있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이다. 영화 속 로드리게스 역시 신의 침묵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고통받는 순간마다 천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고문받는 신자들 앞에서 끝끝내 성화를 밟아야 했던 순간이 오기까지 그가 들어야 했던 것은 오로지 침묵이었다. 예수가 이 참상을 보고도 침묵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성화를 밟기 직전에 내레이션으로 예수의 음성이 들리기는 하는데 솔직히 그 목소리가 진짜 예수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그의 내면의 목소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한테는 가르페 역을 연기한 배우 아담 드라이버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는 했다. 만약 그의 목소리가 맞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로드리게스의 무의식의 반영일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신자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목숨 바쳐 바다에 뛰어들었던 가르페가 그의 입장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예수의 형상이 아니었을까.)

출처 : 영화 <사일런스>

그러나 영화는 그 침묵이 곧 답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로드리게스를 고발하는 기치치로라는 인물이 곧 성경에 등장하는 유다를 의미한다는 점, 중간에 로드리게스가 갈증을 해소하러 강가로 갔을 때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예수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점 등을 비추어 보아 영화는 곳곳에 로드리게스의 이야기가 곧 예수의 이야기라는 장치를 설정함으로써 신은 침묵 했지만 항상 그의 곁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영화 말미, 성물 밀수 검사를 할 때 페레이라가 지나가듯이 내뱉은 말이나 이후 로드리게스가 죽음을 맞이하고 불교식으로 화장할 때 그의 손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작은 십자가는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배교했음에도 마음속으로는 굳건히 믿음을 지켜나갔음을 알 수 있다. 절박한 순간마다 신에 대한 배반과 회개를 반복하는 기치치로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신앙에는 여러 모습이 있고 그 모든 형태를 포용할 수 있다면 결국에 남는 것은 각자의 믿음 그 자체일 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로드리게스가 페레이라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를 떠올려보자. 그는 애초에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페레이라는 배교했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믿음의 문제였다. 누군가에게는 성화를 밟는 일이 이노우에의 말처럼 형식적인 일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종교적 신념과 연결된다면 그 간단한 일조차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누군가에겐 이 침묵이 그저 소리 없음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마음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은 각자의 믿음에 달려 있고 그것은 거세게 억압한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말이다.


평점: ★★★★ 4.0


매거진의 이전글 <I’m Her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