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이, 배우 이유영이 남긴 독보적 캐릭터
<터널>이 끝났다. 이틀 지났다. 종영 당일 써야 마땅했을 주제겠지만, 그 여운을 좀 더 느끼고 싶어 잠시 미뤄뒀다가 이제야 쓴다. 솔직히, 게으른 천성 탓도 없진 않았지만.
드라마 <터널>의 주요 인물은 세 명이다. 박광호(최진혁 분), 김선재(윤현민 분), 그리고 신재이(이유영 분). 그중 신재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몇 마디… 아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길게 적어보려 한다. (다른 두 인물에게는 죄송.)
먼저, 내게 있어 이유영이라는 배우는 꽤 낯선 이름이었다. 필모그래피를 보니 영화 <간신>에서 주연을 맡은 바 있는데, 나는 본래 어지간한 천만 관객 영화도 거의 안 보는 인간인지라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배우의 인지도는 여담으로 치고, <터널>에서의 신재이를 다시 본다. 정말이지, 매우 독보적인 캐릭터다. 그간 봤던 수많은 드라마들을 떠오르는 대로 곱씹어봐도 이만큼 임팩트 있었던 캐릭터는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첫 등장부터 '미친놈 관심 많고, 미친년 연구한다'라는 강렬한 대사로 존재감을 각인시키더니, 줄곧 감정 없는 인간의 극한치를 보여줘 눈길을 끌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도,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지도 못하는,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 Psychopath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랄까.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그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감정? 나한테 그딴 거 요구하지 마. 엿 바꿔먹은지 오래니까."라는 무언의 항변을 쏘아붙이는 듯했다.
급조된 것이 아닌,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불행들이 켜켜이 쌓여서 이루어졌을 신재이의 무감각한 모습이란……. 이야기 초반, 캐릭터에 대한 낯선 느낌이 어느 정도 사그라든 시점. 그녀의 사연을 보기 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서글프다는 느낌을 떠올렸던 건, 이유영이라는 배우의 역량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온갖 잡생각을 즐기는 어느 글쟁이의 머릿속 망상 때문이었을까?
신재이라는 캐릭터에만 온전히 포커스를 맞춰놓고 보면, 다른 두 주연에게 눈길을 둘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보통 어떤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갈등을 몰고 다니는 장본인이며, 때로는 직접 문제를 일으키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얽히고설킨 것들을 풀어내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최전방 포지션을 맡아야 한다.
이러한 프레임을 들이대 놓고 보면, 신재이는 내가 알던 '주인공'의 역할과는 어긋나는 점이 꽤 많다. 먼저 전방에서 뛰는 박광호, 김선재의 '조언자' 역할. 보통은 조연에 어울리는 지위겠지만, 신재이는 주연으로서 그 포지션에 위치해 있다. 몸 쓰는 일에 특화된 두 남정네를 보조해주는 지능형 캐릭터랄까.
공식적으로는 수사 자문을 맡은 학자 신분. 툭하면 부딪치는 박광호와 김선재 사이에서도 신재이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꿋꿋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무뚝뚝하게 다가오는 박광호를 볼 때도, 묘한 기류를 풍기며 관계를 만들어가려 하는 김선재를 볼 때도, 참 꾸준히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마치 목석처럼 한결같이 굴곡 없는 감정선을 그리던 신재이는, 이야기 후반으로 가며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첫 지점은 '공포'였다. 스스로 미끼가 돼 정호영(허성태 분)을 유인하려는 과감함(이라 쓰고 무모함이라 읽어야 할 짓거리였지만.)은 죽음의 문턱까지 밟았다가 간신히 되돌아오는 아찔한 기억을 남겼다.
그 사건으로 인해 박광호의 딸이었음이 밝혀진 뒤, 신재이는 결국 박광호의 타임슬립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 역할까지 겸하게 된다. 여기까지 정리한 뒤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만큼 기구한 스토리를 가진 캐릭터, 진짜 드물다. 흠… '온갖 불행 소스를 다 때려 넣은 잡탕 같은' 인생의 지은탁 정도면 상대가 되려나.
아버지는 행방불명,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사망. 스스로를 지킬 힘도, 능력도 없었던 어린 소녀는 한국을 떠나 입양길에 올랐고, 그마저도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심리학과 교수라는, 사회적으로 보기에 썩 괜찮은 직업과 지위를 얻었다지만… 그녀가 걸어온 과거도, 현재도 늘 거칠고 척박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몇 날 며칠을 팔고도 남을 만큼 많은 사연으로 빚어낸 엄청난 내공의 무표정이었다.
김선재로부터 박광호가 누군지를 듣게 된 시점부터, 꼭꼭 감춰져 있던 신재이의 감정은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비현실적인 사실을 서서히 납득해가는 모든 과정. 그리고 완곡하게 변해가는 신재이의 감정선. 두 개의 흐름이 나란히 내달리며 <터널>의 후반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채워줬다.
따지고 보면, 신재이의 감정을 깊숙이 가둬버렸던 가혹한 운명은 박광호의 행방불명(물론 당사자는 추호도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녀가 박광호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부터 다시 감정을 드러내게 됐다는 전개는 그래서 더욱 가슴 뭉클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원래 살던 시간대로 돌아가기 위해 터널로 향하는 박광호.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신재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라고 소리 내 부른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그렁그렁하게 고인 눈물은, 끝까지 망설이던 마음속 어느 경계선을 넘어섰다는, 극적이면서도 안타까운 증표로 기억됐다. 그 눈물은 아마 펑펑 흘려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던 눈물이었을 게다. 가지 말라 한 번 더 붙잡고 싶었지만, 끝까지 고집할 수 없었을 마음처럼.
신재이는 세 명의 캐릭터 중 가장 늦은 시점에 갈등으로부터 풀려난 캐릭터다. "진짜 간다"는 한 마디만 툭 던져놓고 터널로 들어가는 박광호는, 지금 시대 기준으로 보면 참 표현력 부족한 무뚝뚝한 아빠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신재이의 시선을 잠깐이라도 더 보여줬다면, 가장 오랜 시간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을 인물에게 딱 적당한 배려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이 떠나오기 전이었던 1986년으로부터 2년이 지난 1988년. 박광호는 그 시간대의 김선재와 신재이(박연호)를 다시 만났다. 어쩌면 2017년, 그 시간대에 남겨진 김선재와 신재이는… '매우 특별했던 경험'을 간직한 중년의 박광호를 만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모두가 행복한 진짜배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겠지만… 어쩌랴. 그 시간대의 에필로그는 방송으로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저 개인적인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