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누구나 한 번쯤은 방황하는 거야
#1.
커튼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정확히 눈꺼풀 위로 쏟아진다. 아... 잠들기 전 커튼을 꽉 여미는 걸 깜빡했던가... 짜증이 치밀었지만, 이미 저만치 달아나버린 잠을 어찌할 도리는 없다. 눈만 뜨고 잠시 누운 채로 버텨보다가, 온몸에 피가 한 바퀴 돌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몸을 일으킨다.
머리맡 탁상에 놓아둔 캘린더를 먼저 본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나. 일을 그만둔 뒤로 집 안에 틀어박혀 보낸 시간은 어느새 훌쩍 불어났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때가 있다고들 한다. 소위 말하는 '주저앉아있는 시간'. 내 지난 날은 온통 서서 달려온 시간 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진학 문제로 골머리 썩은 적도 없었고, 대기업을 노리지 않았던 탓에 취직도 꽤 순탄한 편이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연속. 아, 넘어졌던 때가 하나 있긴 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우울 증세에 시달리던 몇 년. 이제서야 할 수 있는 변명이지만, 그땐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내 스스로 쉬어가기로 결정한 거니까.
마음을 굳히기까지 생각은 무수히도 많았다. 쓸데 없는 걱정도 차고 넘쳤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그 모든 것들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기우(杞憂)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어느새 원래 내 모습이 어땠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게 돼 버렸다.
왜 그리 자유로운 시간을 원했었는지, 끝내 가장 처음 생각했던 점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저 막연히 '놀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 하나만을 좇아 그렇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백수의 길로 들어섰다.
#2.
처음 며칠 간은 홀가분했다. 늦잠도 실컷 잤고, 모아뒀던 돈으로 여기저기 놀러도 다녔다. 그야말로 나만의 세계였고, 어느새 그 곳에 푹 빠져들어 지내게 됐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천국 같은 시간.
얼마나 지났을까. 날짜감각, 시간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날 이때껏 스트레스란 놈은 언제 어딜가나 따라다녔다. 그 애정공세가 너무 열띠게 이어져 이젠 공기처럼 자연스러울 지경이다.
대강 씻고 외출 준비를 했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집을 나섰다. 유난히도 화창한 날씨다. 짓누르는 것이 없으니 더욱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 근린공원에 앉았다. 오며가며 바쁜 사람들. 굳은 얼굴, 이마를 톡톡 두드리는 손수건 놀림, 저마다 스트레스의 애정공세를 받고 있을테지. 그들과 나는 같지만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듯하다.
문득 스트레스가 다시 찾아왔다. 휴우... 그럼 그렇지. 심각한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이 녀석이 그리 오랫동안 날 놔줄 리가 없다. 지금까지 날 괴롭혀오던 것들이 사라지자, 또다른 종류의 압박이 발 끝에서부터 친친 감겨온다. 마치 담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처럼.
솔직히, 불안하다. 어느새 온몸을 휘감아오른 압박감은 결국 내 스스로 만든 셈이다. 그동안 내 길이라 믿고 쌓아왔던 것들은 내 손으로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 나는 각자의 길을 달려가는 군상들 속에서 어디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3.
딱히 정해놓은 곳 없이 걷는다. 지나쳐가는 풍경이 제법 아름다운 것도 같지만, 스스로 만든 세계에서 발목을 잡힌 놈의 눈에는 지겹도록 평범한 감흥만 던져줄 뿐이다.
문득, 걸음을 멈춘다. 따가운 햇살 아래 자그마한 나무그늘이 보인다. 이런 날씨에는 당연하다는 듯 먼저 온 손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머리칼이 허옇게 샌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다.
"아이구~ 덥다. 거 고민하지 말고 이리 와 쉬게."
먼저 말을 건넨다. 저 연세쯤 되면 저렇게 되는 걸까?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다니. 요즘처럼 드센 젊은이들이 많은 시대엔 쉬이 보기 힘든 광경이지 싶은데... 뭐, 어쨌든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쉴까 말까 고민하던 건 사실이었고, 어르신의 선제공격(?)을 마다할만큼 배짱이 두둑한 건 아니었으니까.
"......세상 사는 게 참 힘들지?"
선문답. 이건 선문답이다. 아울러 한바탕 설교가 이어질 거라는 신호탄과도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어쩌랴. 노인의 '스테이지' 안으로 들어온 것조차 내 선택인 것을. 그냥 갈까, 말까... 소심하게 고민하는 동안 이미 강연은 시작됐다.
"살아도 살아도 느끼는 게 말이여. 누가 누굴 가르치거나 그럴 자격은 없는 것 같더라 이 말이여. 누군들 생각 한 점 없이 살고 있겄어?"
예상했던 것보다는 명료하다. 구구절절 서론 없이 바로 핵심만 짚는 족집게 과외를 듣는 기분이다.
"고민하고 있는 그거, 뭐든지 일단 혀봐. 지나고 나면 제일 후회되는 게 뭔지 알어? 왜 고민만 하다가 끝냈을까~ 그거여. 차라리 저질러놓고 후회하면 '그땐 내가 왜 그리 지랄했을꼬'하고 웃고 만다 이거여. 그러니까, 뭐든지 일단 혀봐. 물론 생각은 하고 살아야겄지만, 너무 오래 고민하진 말어. 그게 제일 낭비하는 거여."
쓴웃음이 머금어진다.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이 할아버지가 아실리 없건만, 이상하게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온몸을 옭죄던 압박감도 잠시 잊을만큼.
......조용하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옆에 있던 노인은 어느새 사라졌다. 앞에 보이는 골목 어딘가로 사라진 건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거 참, 생각보다 정정하신가보다.
#4.
툭툭. 일어나서 괜스레 옷가지를 털어본다. 조금 전의 어색함과 멋쩍음을 날려버리려는 건지도 모른다. 발길 가는대로 걸어온 곳에서, 우연히 만난 '쿨내 나는' 어르신께 들은 일침.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찌른 짤막한 인생강의.
다시 새롭게 시작해본다. 처음부터, 돈의 논리를 떠나 그냥 '하고 싶었던' 것부터 정리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가 준비해야한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백수가 된 마당에, 거리낄 게 뭐 있겠나.
혼자 있는 시간을 일부러 즐기려 하던 적이 있었다. 썩 나쁘진 않았다. 혼자 남겨짐으로써 내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여 얻은 깨달음도 많았으니까. 그러다 그것이 콱 막힐 때면, 오늘 같은 우연한 만남이 찾아온다. 거짓말처럼, 소설처럼.
문득, 뒤를 돌아본다.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이 장소를 떠나면 다시 까마득히 잊어버릴까봐. 두 눈에 한가득, 오늘의 방황을 담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AC0lh7s73EU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감당할 수 없어서 버려둔 그 모든 것
나를 기다리지 않고 떠났지
그렇게 많은 걸 잃었지만 후회는 없어
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상처 받는 것보단 혼자를 택한 거지
고독이 꼭 나쁜 것은 아니야
외로움은 나에게 누구도 말하지 않을
소중한 걸 깨닫게 했으니까
이젠 세상에 나갈 수 있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줄 거야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다시 새롭게 시작할 거야
더 이상 아무 것도 피하지 않아
이 세상 견뎌낼 그 힘이 돼줄 거야
힘겨웠던 방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