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스페셜 <극야>를 보았다.
주류 영업사원들의 애환, 특히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들의 처절한 사투를 다룬 작품이다.
나는 특히 유연훈이라는 인물에 눈길이 갔다.
그는 5년 동안 공무원 공부에 매진했으나 떨어지고, 친구 수열의 권유로 주류 영업사원의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영업맨 특유의 넉살과 융통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회사에 출근하면 꼴찌 실적으로 맨날 상사한테 깨지고, 영업장에 나오면 자영업자 사장님들이 혹여 계약을 끊을까 봐 최저 단가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하고는 그 차액은 자비로 메우고, 알바생처럼 홀서빙까지 자처하며, 그렇게 호구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빚까지 내가며 차액을 메우고 있는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수열이 안타까운 마음에 "연훈아, 지금이라도 다른 일을 찾아보자" 했을 때, 그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나 공무원 공부 5년 하다가 안 돼서 여기로 도망 온 거야. 근데 여기서마저 도망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쟤는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맨날 도망만 친다고 생각할 거야."
"다른 사람들 생각이 뭐가 중요해?
남 신경 쓰지 말고, 너는 그냥 네 갈길 가면 되잖아."
"여기서 또 도망치면 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봐 그래. 나도 나를!!"
연훈이 지금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이 상황은 그에겐 자신의 저력과 인내심, '나도 이 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야'를 증명하는 중요한 시험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득, 조금이나마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 1인칭 시점으로 그의 심정을 대변해보고 싶어졌다.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면
나(유연훈)도 나를 믿을 수가 없더라.
이러면 마치 망망대해를 홀로 표류하다 난파된 사람처럼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 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 꼭 살아있을 필요가 있는지... 등' 허망한 질문들이 거센 물결처럼 내 안으로 마구마구 밀려들어와 숨을 쉴 수가 없다.
이 생에서 만나는 그 누구와도 헤어질 수 있겠지만 나 자신만큼은 결코 내가 떨쳐버릴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존재이기에, 죽으나 사나, 나는 나를 믿고 나를 잘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신뢰'라는 강력한 접착제로 나는 나와 딱 붙어서 한 몸처럼 기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대상이 내가 과연 믿어도 되는 존재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면, 나는 나와 분리될 것 같아서 두려워진다. 내가 나와 분리되면 나의 멘탈은 산산이 부서져 나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남은 인생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좀비 같은 날들이 될 것이고, 이건 죽음보다 더한...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이 지옥...
내가 나를 잃음으로써 겪게 될 이 지옥을 피하기 위해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미션을 부여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자신을 더욱 거칠게 극한으로 몰아넣으며
"내가 너를 믿어도 되는지, 네가 누구인지... 너의 인내심과 진정성, 너의 저력을 증명해 봐. 이런 극한 속에서도 그 미션을 잘 소화하면 그땐 너를 믿을게."
하며 스스로를 가차 없이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린 후, 꾸역꾸역 기어올라오려는 나 자신을 냉엄한 심판자로서 지켜본다.
낭떠러지에 떨어진 나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부여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이 테스트에 통과하기 위해, 이 동아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처절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속속들이 간파하는 나를 결코 속일 수 없으니, 이 테스트에는 그 어떤 꼼수나 반칙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욱 정공법으로, 앞에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있더라도 고통을 참고 지르밟으며 꾸역꾸역 한발 한발 내디뎌야 한다.
"쟤는 저렇게 힘든데 왜 시궁창 같은 저곳을 벗어나지 않는 거지?"
나의 처절함을, 남들은 그저 미련하다고, 바보 같다고 손가락질해도
지금 내겐 남들의 시선이 아닌, 내 안에 24시간 가동되고 있는 스스로의 냉엄한 시선이 더 무섭다. 그래서 나는 이걸 지속할 수밖에 없다.
이건 어쩌면 내가 나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감옥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 감옥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버텨야 한다. 그리고 버텨낼 것이다.
내 안의 냉엄한 심판자에게 당당하게 인정받을 때까지!
드라마 속 연훈의 심판자는 무자비한 아버지 혹은 권위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 속에서 그 권위자에게 지지 않으려 고군분투했고, 동시에 간절히 인정받고 싶어 발버둥 쳤다. 그 높은 기준만 넘어서면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면서...
하지만 연훈은 간절했던 대형 계약을 앞두고 허망한 사고로 숨을 거둔다. 끝내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꼭 주류 영업이어야만 했을까. 수열의 조언도 거부한 채, 다른 길 찾는 것을 오로지 '도망'이라 정의해 버린 그의 강박적 사고가 안타까웠다.
개인적으로 고통은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운동처럼, 견디고 나면 나를 더 튼튼하게 단련시켜 주는 '나를 살리는 고통'
2. 늪처럼, 열심히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끄는 '나를 죽이는 고통'
연훈이 감당하려 했던 고통은 안타깝게도 후자에 가까웠다.
이미 여기저기에 호구 잡힌 것이 많아서, 그가 열심히 버티려 하면 할수록 그의 노력은 밑 빠진 독에 붓는 물처럼 허망하게 새어나가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시험하지 않고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그의 고통은 마치 스스로를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을 닮았다.
그는 세상과 소통하기보다 자기 자신과의 결투를 택했고, 그 결투는 지나치게 가혹해서 결국 생명을 소모하는 방식으로 끝나버렸다.
그가 끝내 열지 못했던 그 감옥의 문 앞에서, 나는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때로는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존재를 위한 유일하고도 새로운 길일 수 있음을 느꼈다.
내가 믿어온 세계 그 너머의 가능성
영화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사람들은 오랜 투쟁의 장이었던 열차를 벗어나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는 미지의 설원으로 걸어 나온다.
그 설원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음에도 그들이 문을 열 수 있었던 건, 자신들이 믿어온 세계가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촘촘하게 준비하고 계획해도 인간의 계산을 벗어나는 순간은 늘 있다. 그리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은 불안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마치 태어날 때 우리가 눈도 못 뜬 맨몸의 핏덩이 상태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졌지만,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손길과 '미지의 은혜' 덕분에 지금껏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연훈도 자신이 믿어온 세계 너머의 가능성을 조금만 더 열린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내면의 권력을 누가 잡았는가
연훈의 삶이 침몰하고 있는데도 그를 가혹하게만 몰아붙이는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자기 안의 목소리가 늘 유익하거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속 안엔 몇십, 몇백 명의 내가 있어
- BTS / IDOL -
이 노래 가사처럼, 우리 안에는 수많은 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중에는 나를 살리는 나도 있지만, 나를 망치거나 죽이려는 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리더를 신중하게 뽑는 유권자의 심정으로, 내면의 권력을 누가 잡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목소리에 순종하기에 앞서, 그 목소리가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며 나락으로 이끌고 있는 건 아닌지를 냉정하게 분별해야 한다.
연훈의 내면에서 권력을 잡은 이는, 백성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폭군, 숙주의 안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숙주가 죽어가도 질주를 멈추지 않는 암세포,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와 닮았다. 그 목소리는 그의 영혼이 피투성이가 되고, 삶이 망가지고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더 강한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연훈이 맹목적으로 그 목소리에 순종만 할 게 아니라, 한 번쯤 그 목소리의 리더자질을 의심해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조금 더 일찍 그 감옥을 허물고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죽음으로써 테스트가 강제 종료된 지금,
연훈의 처절했던 노력들은 어느 허공을 떠돌고 있을까?
스스로 열어주지 않으면 결코 탈출할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이제는 무사히 벗어났을까?
부디 '무(無)'로 돌아간 그곳에서는 자기 자신도, 고통도 모두 잊고 영원한 평안에 잠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