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폭신한 요 위에 엎드려 뒤굴뒤굴 엉덩이도 한 번 등짝도 한 번 긁적여주면서 핸드폰을 찾아 클럽하우스를 연다. 육아 퇴근 후는 원래 책을 읽는 시간이다. 그러니 책을 펴 놓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그런다고 집중을 하는 것은 아니다. 라디오 읽으면서 책 못 읽는 스타일인 거 스스로 잘 알면서도 잊지도 않고 읽던 페이지를 챙긴다.
묻고 물어가는 길 찾기처럼 알음알음 사람들을 타고 나가는 클럽하우스. 어느새 책을 읽어본 작가님,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는 작가님, 알지 못했지만 이제 궁금해진 작가님, 곧 책을 읽어본 작가님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작가님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깨닫는 것은 고민의 자세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클럽하우스의 매력은 듣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작가님들 이야기에 살며시 손을 들어 대화에 풍덩 뛰어들 수도 있다. 이기주 작가님에게 냅다 손을 들어 고민 상담. 고민의 결이 달라졌고 질이 깊어졌다. 성심을 다한 진중한 말씀 덕분이다.
이게 뭐야? 뭐지? 뭔 다 영어야. 난 뭐 쓸 일 없겠는데? 분명 이런 마음이었다. 뭐 시나브로 무언가에 중독되는 사람들의 첫 변명으로 시작되는 말 같다. 나 정말 그런 마음이었는데. 왜 자꾸 들어가는 걸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 다르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소통할 수 있다는 것, 소통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나와 동류인 사람들을 그곳에서 많이 마주쳤다. 많은 글 관련 방에서 나처럼 리스너로 참여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를 본다. 가끔은 손을 들어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 다름 아니다.
고등학교 때보다 오히려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대학 이후로 친구들과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대화를 하지 않았다. 정작 글을 쓰고 싶어 들어간 학교에서 나도 친구들도 글보다는 다른 인생의 것들에 고민의 비중이 돌아갔다. 글에 대한 갈증은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간 날 일기장에 쏟아붓는 것으로 갈음하려고 했었다. 그런 갈증들을 간혹 발견한다. 고민을 이야기하는 그들에게서, 공감하고 있는 나에게서.
지난 주말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일어난 김에 식사 준비를 미리 해놓기로 했다. 음악 대신 클럽하우스를 틀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 내용이 맞지 않다 싶으면 음악 방을 찾아들었다. 평온한 안온함이 흘렀다. 한동안은 클럽하우스를 열어볼 것 같다. 그런데 책은 언제 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