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구나. 이런 성향의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군.”
“아, 하나 더. 글이 따듯하다, 따듯한 사람이 쓴 글이다, 이것도.”
“그건 의외네. 글이 꽤나 날카롭고 불편할 거라 예상했는데.”
“뭐가 의외였어?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 당신이야 이미 나를 아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근데 이 글을 보고 바로 그렇게 반응한 것이 의외였어.”
“그럼?”
“알지만 어렵고 불편하다고 할 줄 알았지.”
“뭐야, 알면서도 그렇게 쓴 거야?”
“‘남들이 뭐라 하든 흥!’ 이런 느낌보다는 ‘뭐라 해도 이 부분은 어쩔 수 없어’ 이런 느낌이지.”
“무슨 차이래요?”
“민감한 주제에 대한 날카로운 문체니까, 읽는 이로서 버거운 문장이라는 건 나도 알아요. 근데 이런 부분은 어쩔 수가 없네. ‘난 내 주장이 너무 강하니까 너희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쓰고 이렇게 쓸 거야!’ 이런 뉘앙스보다는, ‘나한테는 이게 최고야. 그게 곧 상대한테도 최고라는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이 글이, 이 방식이, 이런 논리와 문체가 가장 나아. 지금 내게는 이것보다 더 좋은 방식은 모르겠어. 쓴다 해도 내가 만족이 안 되고.’ 이런 느낌인 거지. 이것 역시 개별성일까?”
“어렵네. 개별성이라 하기엔 너무 강하고, 유난스럽다고 하기에는 좀 보편적이고.”
“그래서 지금 내게 좋은 글이라는 것은, 범용적인 최적상태라기보다 지금 현재 나한테 가장 맞는 개인적인 최적상태를 뜻하는 것 같아.”
“굳이 글만 그러진 않지?”
“그렇지. 글, 말, 행동이나 사는 모습까지 전부. 좋게 말하면 색깔이 강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거지. 그것도 너무.”
“사실 아까 그 생각했어요. 이렇게 사는 사람이구나. 알고 있었지만 정말 강하다. 참 선 나누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맞아. 두루뭉술,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런 게 별로 없어. 나눌 수 있는 것은 다 나눠놓고, 하나하나 이름표를 붙여놓으니까. 이건 이거, 저건 저거, 이렇게 내가 파악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 그리고 그렇게 파악한 것들이 어떤 조합으로 섞이느냐에 따라 어떤 작용을 하고 반응이 나오는지 살펴보는 걸 좋아하고.”
“그래서 좋아 보이는 부분도 있고, 또 그래서 힘들어하는 부분도 보여요.”
“그러게요. 사실 모든 것을 그렇게 나눠 놓을 수도 없고 굳이 나눌 필요도 없는데 어느 순간 인이 박힌 듯 굳어버렸어요.”
“원래는 어땠어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그러진 않았을 거 아냐?”
“어땠더라… 열아홉 살 이전의 나는 사실 주워온 옷을 입고 살던 느낌이라서. 교육받은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살아서 그게 진짜 나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래.”
“그게 도령이 아닌 건 아니잖아.”
“그렇지. 물론 그 역시 나지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내가 규정하는 나랑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느낌이야. 내 3대 기준을 베이스로 만든 가치관과 사상을 가지고 내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게 ‘나’의 정의라면.”
“3대 기준?”
“시비. 가부. 호불호.”
“시비랑 이성, 그리고 뭐였더라….”
“시비. 공감. 이성. 그거?”
“그래, 그거. 우리 여행 갔을 때 말해줬던 거. 그건?”
“둘 다 인간의 조건인데, 그건 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조건이고 이건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조건이야.”
“지금 내가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한 거죠?”
“당연하지, 말 초반부인데. 끝까지 들으면 이해가 될 거예요.”
“오케이. 말 잘라서 미안해요. 다시.”
“아무튼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게 나라면, 그 전은 그러지 못했거든. 일단 무슨 생각 자체가 없었어. 그냥 살았지. 이제 중학교에 들어간다고? 그럼 중학생이네. 이제 열일곱이니까 열일곱 살의 삶을 살아야겠다. 이런 식이었던 거야. 이조차도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라 그냥 무의식적으로, 남이 하니까 나도, 그렇게 주변과 상황을 무작정 따라갔어. 이건… 내 기준으로 보면 나이를 먹은 게 아니에요. 그 나이가 되었으니 그냥 ‘그 나이’라는 옷을 갈아입은 것뿐이야. 그리고 그 나이의 남들이 사는 것처럼 따라 산 거지.”
“지금 그게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내가 무슨 반골 정신으로 남들 하는 것은 무조건 따라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내가 규정해서 내가 살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 모습이 또래의 남들과 높은 확률로 같은 수도 있고, 낮지만 다를 수도 있죠. 하지만 어쨌든 그냥 사는 건 아니잖아. 2015년이 되었다고 그냥 서른한 살의 나를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게 아니듯이. 어리고 부족하니 좌충우돌하고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에게 조언이나 도움도 받겠지. 아니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는 거야. 그냥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무엇을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으니 그것을 채우고, 해가 떴으니 하루를 살아내는 그런 식이 아니라.”
“응. 내가 그렇게 오해한 건 아니고, 그냥 한 번 물어봤어요.”
“열아홉 이전의 나는 그랬던 것 같아. 그냥 레일 위에 오른 미완성의 공산품이었어. 흘러가는 순서에 따라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그러다 어깨띠를 매고 레일 끝으로 떨어지면… 뭐,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공산품이 되겠지. 하지만 공산품이 떨어질 곳은 또 다른 레일 위란 말이야. 그렇게 배 위에 실린 관처럼 요단강을 향해 끝없이 흘러가는 거지.”
“강해. 격해.”
“표현이?”
“모든 것이.”
“듣기 별로예요?”
“아니, 이제 와선 그래야 도령이지 싶어요. 다시.”
“그 무렵 나는 그게 싫었나 봐. 정확히는 세상이 한 번 우르르 무너지고 나서야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살았음을 깨닫게 됐어. 더는 그렇게 살기 싫더라고. 그래서 맨발에 누더기만 걸친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녔어. 있어 보이는 말로 방랑한답시고. 그때부터는 뭐, 당신도 알다시피 벽돌 주우러 다닌 거지. 나라는 건물, 그리고 내가 머물 나라를 만들 때 필요한 것들을 본능적으로 찾아다녔어. …왜 웃어요?”
“난 참 벽돌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흥미진진하더라.”
“왜?”
“그냥. 나한테 없던 시대라 그런가. 아무튼.”
“아무튼, 그때 나는 시비나 가부의 경계가 애매했어. 반쯤 미친 사람처럼 살아서 거의 없다시피 했지. 반대로 호불호는 아주 극명했고. 그래서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하면서 참 이리저리 돌아다녔어. 이제와 생각해보면 얼굴 화끈거리는 일도 많았고,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도 욕밖에 안 나오는 못난 짓도 많이 했었어. 소위 말하는 이불킥 시즌이었던 거야. 물론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보다 더 순수하게 했었던 선의들도 있었고. 아무튼 세상 기준이야 알 게 뭐냐는 식으로 가리지 않고 살았어. 그리고 노린 건 아닌데, 그런 다양한 경험이 내게는 전부 어딘가에 써먹을 수 있는 벽돌이 되었고. 뭐,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죠?”
“근데 신기한 게 도령 그 무렵쯤 얘기는 들을 때마다 매번 새로워.”
“왜 그러지? 매번 똑같은 얘긴데?”
“아마 도령한테 중요해서 그런가. 다른 얘기에도 자주 그때가 나오잖아. 그만큼 그 시절은 도령한테 중요한 키포인트 같은 거? 그때 얘기를 빼면 다른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중요한 거겠지. 그래서 자주 나오고, 그래서 말할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아.”
“…그렇구나.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어. 처음 들었네.”
“이건 그냥 내 생각.”
“근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나라는 사람의 모태가 만들어지고, 모든 사상의 근간이 되는 시절이니까. 그래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에 맞춰서 조금씩 다른 모습이 되나 봐. 예를 들면, 커다란 건물의 이곳저곳을 가까이서 부분적으로 찍은 것처럼. 그러면 오브제로는 같은 건물인데 사진은 각자 다른 피사체의 모습을 담게 되잖아.”
“맞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게 그 말이야.”
“그런 가봐. 좋은 게 배웠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마저 해줘요.”
“음, 그러니까….”
“벽돌 수집가까지 했어.”
“맞다. 아무튼 그때는 그랬어요. 굉장히 엉망이었지만, 어찌 보면 내게는 지금보다 더 충실함과 내실로 빛나는 시절이었어. 하고 싶은 것만 해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부분, 내 것이라고 생각한 행동을 했거든. 그러니까 하루가 온통 내 의지로 가득 차있었어. 사람을 만나도 내 의지, 안 만나도 내 의지. 심지어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나 즐겁지 않은 일을 할 때도 어쨌든 내 의지. 그게 참 좋았어요. 하루를 내 생각과 의지로만 채워 넣으니까 하기 싫은 것과 즐겁지 않은 것도 결국 내 의지로 하게 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정확히는 누가 시켜도 그의 의지로 하는 게 아니라 내 의지로 하는 거지. 안 할 거면 모를까 할 거면 말이야. 근데 그 전에는 안 그랬어. 그 전은 생각 자체가 없으니 의지도 없었어.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이든 하기 싫은 것이든 남의 의지로 하게 됐어. 최근에도 약간 그런 면이 생겼어요. 요즘 내 하루도 대부분 내 의지로 채우지만 그 무렵처럼 충만하지는 않은 듯해. 환경이나 나이 때문이 아니라 내 의지 문제 같아. 특히 무기력하거나 방황 중이거나 아니면 만성적인 매너리즘이 넘쳐흐를 때면 내 의지가 더 사라져. 하루 중에 절반이 안 될 때도 있어. 그럼 진짜, 엉망이야. 그렇게 되면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조차 생각없이 하게 되거든. 이 두 개는 무엇보다 내 생각, 내 의지로 해야 하는 것들인데.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되는 것들인데. 게다가 그러다 보면 자연히 하기 싫은 것과 원하지 않는 것까지 덩달아 의지 없이 하게 돼. 그건… 진짜 끔찍한 거야.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자신이 없어지니까.”
“얘기 듣는데 속이 따끔따끔하다.”
“지금은 나도 당신도 안 그렇잖아. 의지를 꾸역꾸역 채워 넣고 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그 시절은 나한테 망나니처럼 엉망이었던 시절이 아니라, 비록 엉망이었지만 찬란했던 시절로 남았어.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다시 누울 때까지 나라는 페달 보트가 열심히 달리던 시절이었지. 순풍이 불어서 무동력으로 순항할 수 있어도 계속 페달을 밟고, 자는 것마저 최선을 대해 자면서.”
“이 악물고 끙끙 대며 자는 어린 도령 상상하니 왠지 웃기면서 안쓰럽다.”
“맞아. 주변 사람들도 뭘 그렇게 전투적으로 자냐고 웃다가도, 몇 시간 못 자는 거 보고는 힘내라고 고기 사주던 시기지.”
“역시 도령한테 고기는 만병통치약 같은 거네!”
“만통약 겸 어지간한 건 다 용서하게 되는 사과의 씨앗 같은 거지. 뭘 잘못해도 밥 사주면 땡. 고기 사주면 바람피우는 거 빼곤 거의 넘어갔으니까.”
“이 와중에도 바람에 대한 강력한 극혐!”
“다 되는데 그건 안 돼. 그것만큼은. 나는 트라우마가 사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가진 유일한 트라우마가 그거니까. 물론,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사람이니까 흔들리기도 하고, 선을 못 지키고 넘기도 해.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는 거지. 그 자체를 납득 못하는 건 아니야. 단지 납득만 하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지.”
“당연히 상대나 도령이나 똑같이?”
“당연히. 특히 나한테는 더. 상대가 바람피우면 그냥 관계가 끝이지만 내가 그러면 관계만 끝나는 게 아니라, 분명 다른 페널티도 있을 거야. 근데 페널티가 뭐든 간에, 바람피울 바엔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아.”
“남자에 대한 여자의 가장 큰 걱정 하나가 줄었네.”
“내가 내 말을 지킨다는 전제 하에.”
“나야 보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한 번도 어긴 적 없다면서요?”
“그렇지. 그와 관련된 모든 신념은 어긴 적 없어요. 그리고 우습지만 어길 수도 없어. 어기려고 하면 토할걸.”
“토를 한다고? 실제로?”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조금 다른 상황이긴 한데, 이별 후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성적으로 만졌을 때 바로 웩! 했거든.”
“아, 그래서 유예기간.”
“그 이유만 있지는 않지만, 맞아. 바람피우지 않는 것도, 이별이 겹치기 없이 말끔해야 하는 것도, 마음 정리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못 만나는 것도 전부 내 트라우마에서 파생된 거니까.”
“신기하다.”
“그쯤 돼야 트라우마지. 나한테는 그래. 그런 비슷한 환경에 처하거나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며칠 동안 잠 못 자고, 밥 못 먹고, 토하고, 오한과 발열이 따발총처럼 번갈아 와야 그게 트라우마지. 조금 싫은 거라고 이곳저곳 아무 데나 툭툭 갖다 붙이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아직 하나뿐인 거고. 단순한 신경증은 많아. 히스테리나 노이로제는 몇 개나 돼. 근데 그건 그냥 예민해지고 과민 반응하고 화나고 신경 쓰이고 속 안 좋고 입맛 없고 잠 좀 안 오고, 그냥 그러고 마니까.”
“이건 또 새로 알았네. 그 기준이 엄청 좁구나.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단어에 대한 개인적 정의와 활용이니까 맞고 틀린 건 아니지. 그냥 서로 다른 무게로 쓰는 것뿐이야. 미리 알고만 있으면 다른 규격 때문에 헷갈릴 일도 없고.”
“아무튼 고기와 트라우마는 그렇다 하고.”
“맞네, 또 다른 소리 하고 있었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거예요. 열심히 살았던 건 열심히 살았던 거고. 정작 문제는 세상만사 태평해서 생각 없이 살던 교복 꼬꼬마가 갑자기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야 했다는 거야. 그에 당연히 쉽게, 무슨 사기꾼 하다가 정치인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바뀔 리가 없지. 아무튼 더럽게 어려웠어. 물론 사는 건 지금이 더 어렵지만, 그때 역시 다른 의미로 지금보다 덜 어렵진 않았어. 맨발에 누더기가 가진 재산 전부니 도대체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가장 중요한 건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한 거지. 너 이거 할래? 응. 이거 먹을래? 응. 저기 갈래? 싫어. 나 어때? 꺼져. 이러면서. 근데도 너무 어려웠어. 세상 모든 것이 나한테 너무 거대하고 압도적이어서 모조리 무섭고 두려운 거야. 이제야 생각해보면 접시 물에 코 박은 상황도 많았지만 그때 내게는 태평양 한가운데였었거든. 그래서 내가 무엇을 했게?”
“맥락을 보니 그때부터 뭘 나누기 시작했어?”
“그렇지. 아주 초반부터는 아니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주워 먹다 보니 얼추 창고 서너 개쯤 벽돌이 쌓였을 무렵이었어. 그 무렵부터 좀 가리기 시작했어. 모든 것을 내 생각과 의지로 해서 좋지만, 이제는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은 좀 안 좋더라고. 필요가 없다는 느낌보다 이젠 과하다는 느낌이었어.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게끔 만든 중요한 사건도 몇 있었고.”
“…군대 면회.”
“맞아. 그것도 그중에 하나.”
“나 사실… 아니다. 말 잘라서 미안해요.”
“어이구, 그 말 잘라서 미안해요 소리 좀 그만해. 뭔데? 궁금해서 말 더 못해.”
“아니, 나도 그거 보고 뭐였지, 악행록? 그거 써보려고 했는데 한 장도 못 채우고 그만뒀다고.”
“나도 그런 특수한 상황과 매머드급 충격이 없었으면 못했을 걸.”
“아무튼 그랬다고.”
“그리고 아무 때나 말 잘라서 미안하다는 말 붙이지 마요. 진짜 붙여야 하는 상황에만 붙여요.”
“알았어요.”
“그만큼 나를 신경 써주는 거니까 고마워요. 특히 요즘에는 더 그렇고.”
“요즘 당신이 타인과의 대화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더 조심하게 되네.”
“아니, 당신이 왜? 지금 내 주변에서 대응식 대꾸보다 감화식 대화가 많은 유일한 사람이 당신인데. 다 눈치 봐도 당신만은 안 봐도 돼.”
“알았어. 아무튼 다시.”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본능적으로 3가지 기준을 먼저 세웠어요. 그게 아까 말했던 시비, 가부, 호불호야.”
“호불호는 그전부터 있지 않았어? 시비랑 가부는 없었다 해도 좋고 싫은 것은 골라했다면서요?”
“맞아요. 근데 여기서 말하는 호불호는 그 전의 좋고 싫음이랑은 조금 달라요. 그 순간에 즉흥적으로 좋고 싫음이 아니야. 시비와 가부를 기준으로 삼고 서로 연동되는, 나라는 사람이 원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고르는 거야.”
“…이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쉽게 말하면 어떤 상황이나 입력이 없는 무위, 그러니까 평온한 상태에서 좋고 싫은 거 있잖아.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더운 날에, 돌아다니느라 땀 쭉 빼고, 그리고 시원한 데 들어와서 아메리카노 아이스를 시켰어. 그게 너무 시원하고 좋은 거야. 그럼 아메리카노 아이스가 내게 ‘호’일까.”
“도령 아아 별로 안 좋아하잖아. 맨날 뜨거운 거만 먹지.”
“그렇지. 아닌 거야. 나는 아메리카노는 따듯한 게 좋아. 아메리카노뿐만 아니라 더치나 가끔 먹는 얼음땡 드립 빼고는 커피는 원래 뜨거운 걸 좋아해. 그게 커피에 대한 원래의 내 ‘호’인 거야. 근데 여름에만, 그것도 너무 더운 날씨에만 간혹 차가운 게 당길 때가 있어. 덥다고 무조건 차가운 커피를 마시는 건 아니니까.”
“아, 그런 거구나.”
“그런 거지. 즉흥적인 순간이나 어떤 특정 상황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원래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 물론 호불호를 따질 때 순간이나 상황처럼 외부 입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원래’라는 것은 특수성이 배제된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상황을 말하는 거야. 아까 말한 대로 비일상적 입력이 없는 무위의 상태. 그때 ‘좋고 싫은 것’이 내게 있어서 3대 기준 중에 하나인 호불호인 거야. 아까 말했던 호불호는 그냥 그 순간 그 상황에서 내키는 대로 하는 지극히 즉흥적인 좋고 싫음이고. 나한테는 서로 다른 거야. 그리고 이건 시비와 가부에도 마찬가지야. 원래 ‘옳고 그런 것’, 그리고 유위가 아니라 무위에 가까울 때의 ‘되고 안 되는 것’. 아! 물론 유위와 무위가 모든 상황에서 반대 개념인 건 아니지만 여기선 뉘앙스 전달을 위해서 그렇게 쓸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변수가 제로인 보편적 상황의 시비, 가부, 호불호부터 제대로 정해놓는 거야. 그래야 변수가 생기거나 사건에 특수성이 부여되어서 내가 혼란스러워도 덜 비틀댈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지. 한창 혈기왕성한 시절에 이성과 밀폐된 곳에서 술을 마시는 중이야. 이 사람은 참 예쁜데 난 임자도 없는 상태고, 뭐 까짓것 상대가 먼저 유혹까지 한다고 치자. 그럼 마음의 거리낌도 다른 뒤탈도 없겠네. 그렇다면 상대와 연애 중이 아니라도 이런저런 게 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 그래, 그냥 까놓고 말해 야한 게 하고 싶지. 고민되고, 갈등도 할 수 있지. 나도 그래. 그냥 참는 거고 한 번도 못 참아본 적이 없는 것뿐이지, 나 역시 아주 혈기왕성한 남자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순간 여러 생각이 들어.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충동을 느꼈다 해서 그게 나한테 ‘호’가 아닌 거야. 상대가 먼저 유혹했다고 해서 시비에서 ‘옳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뒤탈도 없을 테니 가부에서 ‘되는 것’도 아니지. 원래대로 하면 나한테 저건 불호고, 그른 거고, 안 되는 거니까. 근데 이 기본값, ‘0’의 기준이 없으면 저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너무 흔들려. 그리고 많이 흔들릴수록 더 쉽게,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으로 자신을 속이려고 해. 그럴 수밖에 없어. 애당초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까 나중에 후회할 일을 충동적인 판단으로 저지르는 거야. 그 순간 스스로 괜찮다고 속이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지. 각자의 삶의 방식이겠고, 당연히 나와 다른 이는 생각이 다를 수 있지. 근데 나는 그런 게 너무 싫었어. 물론 충동도 본능도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충분히 존중해. 내가 뭐 슈퍼에고이즘의 화신도 아니고 금욕적인 이드포비아인 것도 아니야. 단지 기준없이, 그때그때 앞뒤가 안맞는 논리로 합리화하면서, 그렇게 타인의 의지에 휩쓸리거나 충동에 끌려 다니고 싶진 않았어. 저쪽으로는 실수한 적 없지만 다른 기준들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실수를 했거든. 그 흘러가는 대로 사는 동안에 상처도 많이 받고, 그 몇 곱절로 많이 줬어. 그리고 그건 결국 전부 나한테 돌아올 게 분명하고, 실제로 돌아왔었지. 그래서 저 3가지 기준을 가장 먼저 세운 거야. 가장 먼저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까 인간의 3가지 기준을 인간성과 개별성으로 나눴었죠?”
“응.”
“시비와 공감, 이성. 이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3가지 요소예요. 이게 있어야 ‘인간의 인간성’이 성립되는 거지. 그리고 시비, 가부, 호불호. 이게 나를 나답게 만들어줘. 인간성을 유지하는 인감임과 동시에 내가 나이도록, 나일 수 있게 특성을 부여해줘요. 즉, ‘인간의 개별성’ 요소인 거예요. 공감이나 이성이 있다고 나의 개별성이 드러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인간임을,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음을 증명해줄 뿐이지. 어떤 이성을 지니고 어떻게 공감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건데 그걸 결정하는 건 결국 가부와 호불호잖아. 시비만 겹치는 거야. 옳고 그른 기준은 선험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무엇이 되고 안 되는지, 다른 말로는 괜찮은지 아닌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이 가부와 호불호는 지극히 개별적 특성이니까. 그래서 내가 나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동안 가리지 않고 주워 먹어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된 나를 나이게 하고 싶어서 일단 저 3가지부터 부여잡은 거예요. 게다가 이 셋은 아까 말했듯 서로 연동되어 있어요. 어느 하나를 우선 완성해서 기둥 세우듯 하나씩 추켜올리는 게 아니라 처음은 시비 1%, 가부 2%, 호불호 1%. 다음은 3%, 2%, 4%. 그다음은 5%, 7%, 6%. 이런 식으로 유기적으로 호환하면서 셋을 동시에 증축하는 거니까. 그러니 시작하기 부담스럽지도 않았어요. 어려울 것도 없고. 단지 그걸 끝까지 만들어가는 것과, 만드는 동안에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려웠지.”
“그래서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도 흔들린다고 말한 거구나.”
“그렇죠. 하나가 무너졌다고 다른 두 개가 반드시 무너지는 건 아니야. 셋이서 내 존재를 떠받치는 모양새니까 하나가 무너져도 나머지 두 개로 당장은 버틸 수는 있어. 근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면 하나가 완전히 무너지면 나머지도 결국 무너지더라고. 인생에 있어서 두 번 밖에 없었던 사건이라 일반화시키기는 힘들지만.”
“그래서 그 방법이 그거였던 거예요? 나누고 딱지 붙이고 그런 거?”
“맞아요. 나는 나여야 해. 나이고 싶어. 그러려면 3가지 기준을 제대로 강건하게 세워야 해. 근데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도 아는 것도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정말 1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쌓아간 거죠. 무너진 폐허에 앉아서 근처 벽돌 하나 집어 들고, 살펴보고, 닦고, 분류했어요.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블록으로 설계도를 만들었다는 것과 같은 행위야. 그렇게 시작한 벽돌 한 개가 곧 한 묶음이 되고, 또 한 수레가 되고, 결국 한 무더기가 되었어. 그러다 어느날 문득 이상해서 뒤를 돌아봤는데 지금껏 쌓아온 벽돌 무더기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그 자리에 건물 하나가 떡하니 서있는 거야. ‘어? 이게 뭐지? 나는 그저 벽돌을 집어서 살피고 닦아서 분류만 했는데 언제 건물이 생겼지? 가장 쉬운 것만 계속 반복적으로 한 건데 건축술도 모르는 내가 언제 건물을 세웠지? 이게 뭐야! 유레카!’ 말 그대로 환희였어. 단어도 모르고 문법도 안 배우고 알파벳만 계속 적었더니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하게 된 기분인 거야. 그때부터는 뭐, 아주 신났지. 그것밖에 못하는 기계처럼 계속 벽돌만 닦았어. 그러다 보니 하나둘 건물들이 늘어났고, 만든 건물들 사이로 길을 트고 나무도 심으니 어느새 마을이 되더라. 시간이 더 지나니 마을은 도시가 되었고, 그리고 결국 나라가 되었죠.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10년이었어. 2003년 2월 그 시리던 겨울에 첫발을 떼었던 그 자리부터 걷고 걷고 계속 걷다 보니, 어느 날 언덕을 걸어내려가던 중에 불현듯 깨닫게 되더라. 어느새 나는 왕이 되었구나. 왕이 되려 떠난 걸음은 아니었다만 이 세계의 왕이 되기 위한 여정이었구나. 내가 정말 여기 맨 아래에 묻혀있는 이 나라의 첫 번째 돌인 초석부터, 저 멀리 보이는 저 왕성의 마지막 지붕까지 다 올렸구나. 그렇게 내 나라를 내려다보며 감격에 젖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해.”
“그리고 그 나라가 작년에 와르르 무너졌지.”
“킬킬. 그래서 참 많이 울었죠. 힘들면 글을 쓰는 놈이라, 작년에 쓴 일기만 2900쪽쯤 쌓였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고생했어요. 이 말은 해도 해도 과하지 않네.”
“그리고 그 옆에서 날 지켜준 게 당신이고.”
“…….”
“아무튼 그런 과정을 너무 반복하다 보니 인이 배겼는지, 나는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살피고 분류하고 도장 찍어 규정해야 하나 봐. 물론 전부 그럴 순 없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다 해도 죽을 때까지 다 하지도 못할 거야. 또 그래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그래도 내게는 그런 기계 같은 부분이 있어요. 손이 놀고 있으면 손으로, 눈이 놀면 눈으로. 잠시 머리가 비었으면 생각으로 잡히는 족족 그런 걸 하게 되네.”
“…….”
“…얘기가 너무 재미없었나.”
“도령, 고기 먹을래?”
“갑자기 웬 고기?”
“그냥…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기껏 힘들게 꺼낸 게 고기야?”
“그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어서.”
“이래서 난 직관적인 사람이 좋더라. 그것도 센스 있게 직관적인 사람. 이렇게 뭘 모르는 상황에서도 귀신 같이 정답을 찾아내잖아. 당신은 벽돌 안 닦아도 되겠다.”
“도령도 그런 사람이잖아.”
“A에서 B, C, D 다 스킵하고도 정확히 E로 뛰어넘는 직관력은 당신이 훨씬 나아. 나도 좀 한다 싶었는데 비교도 안 되네.”
“그런가? 잘 모르겠네. 나는 가끔 이 나이 먹고 그때의 도령만큼도 오지 못한 건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