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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 전쟁

feat 정장과 사복의 전쟁사

by Emile
정장이 있긴 해요?


젤렌스키와 트럼프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니아 대통령의 회담에서 고성이 오간 가운데 그 시작에는 '정장'이라는 복장의 문제가 었습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오늘 제대로 차려입었다"라며 군복을 입지 않았으면(정장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묵살한 그의 옷차림을 비꼬았지요. 젤렌스키는 비록 군복대신 검은색 셔츠를 입긴 했지만 카고 바지에 전투화까지 신어 군복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둘의 대화는 초딩의 놀림 같았지만 '정장'에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그리고 '군복'에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었기에 말다툼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지요.


정장이란?


suit

정장(正裝)은 '상의와 하의를 같은 천으로 만든 한 벌의 양복'을 뜻합니다. 양복(洋服)이라는 말은 서양의 옷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기에 이는 더 엄밀히 말해 '서양식 격식을 갖춘 정식의 복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보통은 영국 잉글랜드 전통의상에서 비롯된 격식을 갖춘 슈트(suit)라는 옷차림을 일컫습니다.


오늘날 서양식 정장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유럽의 귀족들의 복장, '프록코트'에서 비롯됩니다. 프록코트(Frock coat)는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옷자락이 특징인 남성용 정장 코트지요. 이후로는 테일 코트가 나오게 되는데, 테일 코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뒤의 꼬리가 길게 뻗은 형태의 코트입니다.


이는 원래 유럽의 군대에서는 코트를 착용했으나 승마나 행군할 때 앞자락이 거치적거리고 불편해서 앞자락 끝을 뒤쪽에 단추로 고정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아예 처음부터 앞자락을 없애고 코트 앞자락을 고정한 모양으로 박음질해서 만든 것이 바로 테일 코트지요. 원래는 격식을 차린 정장이 아닌 활동성을 위해 고안되었으나, 점차 프록코트보다는 격이 낮은 간단한 정장이 필요한 자리, 귀족들의 사교 파티 같은 곳에서도 쓰이기 시작해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다가, 결국에는 국왕을 만날 때에도 입을 수 있는 예복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러한 테일 코트에서 꼬리마저 잘라버린 것이 턱시도입니다. 턱시도(tuxedo)는 남성의 예복 중 하나로, 본래는 야간에만 약식으로 착용하는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콩쿠르 같이 다른 곳에서도 보다 편리하게 입게 되며 활동성을 훨씬 살린 오늘날의 정장의 모습에 가까운 모습에 이르게 됩니다.


정장의 친구들


원래의 영국 정장 스타일은 셔츠, 바지, 조끼, 재킷, 넥타이, 구두, 모자, 코트, 지팡이 까지가 한 세트였습니다. 마치 갓을 쓰듯 모자까지 갖추어 써야 말 그대로 '정장'이었지요. 그러다 19세기 중엽, 미국 브룩스 브라더스에서 맞춤형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하고 사이즈별로 파는 기성정장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정장의 스타일도 셔츠, 바지, 재킷, 넥타이, 구두의 다섯 세트로 간소화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재킷 안에 입는 조끼까지 선택지가 되면서 정장 세트는 달랑 재킷과 바지만 남겨 놓게 되었지요. 구두와 넥타이가 그 애장품 정도로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다 점차 넥타이까지 밀려나고 있습니다. 갈수록 단정한 니트나 티셔츠에 재킷 정도만 입어도 어느 정도 단정한 복장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정장에 맞춰 입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구두의 앞날도 밝지만은 않습니다. 정장에 운동화를 아직 신지는 않지만 점차 캐주얼화 되는 것이 그러지 말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정장일까? 죄수복일까?


개인적으로는 정장 비슷한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은 교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복은 정장과 비슷한 소재에다 넥타이를 매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느낌은 죄수복에 더욱 가까웠지요. 넥타이는 어딘가에 목이 매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유용한 목줄이었으니까요.


이후 면접과 취업을 통해 정식으로 정장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넥타이라는 목줄은 더욱 세게 목을 옥죄었지요. 그래도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직장에 다닌다는 것은 꽤 괜찮아 보이던 때였습니다. 무더운 날이면 땀으로 넥타이까지 젖고, 머리가 띵하도록 숨이 안 쉬어지기도 했지만, 정장에는 이미 사라졌다는 '화이트 칼라'라는 허세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백바지 사건


유시민 전 의원

정장의 허세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2003년 국회의원으로 등원하며, 베이지색 바지에 감색 재킷을 입고 넥타이도 매지 않고 등장한 유시민 작가의 일명 '백바지 사건'입니다. 지금 보면 그저 캐주얼한 차림에 불과할 정도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갔는지 그 당시는 그것이 무슨 내란죄라도 되는 듯 곳곳에서 그를 비난했고, 심지어 일부 국회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기까지 한 대단한 사건이었지요. 아무리 유시민 작가라도 그다음 날 정장을 갖춰 입고 나온 후에야 의원 선서를 할 수 있었던, 젤렌스키도 울고 갈 촌극이었지요.


이렇게 곤고한 정장의 시대였지만 서서히 정장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습니다. 삼성 같은 대기업을 필두로 직장에서도 '복장 자율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시민 작가가 혼줄이 난 게 엊그제인데 그 당시로는 무척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렇다고 맘대로 입어서는 안 되고 '비즈니스 캐주얼'이라 해서 셔츠와 재킷을 입되, 티셔츠는 안되고, 면바지는 되고 청바지는 안되고, 구두는 되고 운동화는 안되고, 그것이 때에 따라 됐다, 않됐다 그 해석이 아주 콩글리시 같았습니다.


비즈니스 캐주얼


처음 그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을 한 다른 회사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후줄근해 보일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정장을 벗고 막상 그 복장을 해 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퇴근 후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어서 무척 맘에 들었습니다. 교복을 벗어던진 느낌과 비슷했지요. 교복이 죄수복이었다면 정장은 노예복이었던 걸까요?


그러다 유시민 작가의 '백바지 사건'은 저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막상 '비즈니스 캐주얼' 제도를 시행해도 꼰데들의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고 저항은 강했지요. 그래서 여전히 넥타이만 푼 채 장장을 입고 나와 입으로는 자유롭게 입으라면서 행동으로는 은근히 정장을 계속 입기를 원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출근하면 위아래를 훑어보며 복장이 맘에 들지 않다고 광선을 쏘기 일쑤였던 기억이 나지요. 백바지를 한번 입었을 때는 결국 술자리에서 상사로부터 주정 같은 한마디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아슬아슬한 정장과 비즈니스 캐주얼의 선을 타는 것은 나쁘지 않았지요. 오히려 아침마다 눈에서 쏘는 광선을 즐겼습니다.


노타이는 혁명일까?


그러나 이직으로 인하여 비즈니스 캐주얼의 시대는 짧게 막을 내리고 맙니다. 다시 정장의 시대로 회귀했지요. 이번에는 반팔 와이셔츠도 금지라는 엄격한 중세의 복장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다 갑자기 변혁을 맞이합니다. 넥타이가 사라진 것이지요. 노타이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겨울에는 따뜻한데 여름 넥타이는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넥타이만 풀어도 얼마나 머리가 시원하던지 진짜로 머리 회전이 두세 배는 빨라지는 효율이 증가했지요.


그러나 넥타이 없는 정장은 팥 없는 찐빵, 슈크림도 없는 붕어빵이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남들도 한다니 노타이 제도를 도입한 사장님부터 당장 모임에 나가 실업자가 된 거 아니냐고 놀림을 받았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았지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아무래도 정장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우스꽝스러운 차림은 마치 조폭과 닮았습니다.


조폭이 정장을 입는 이유


정장의 전성시대

조폭이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조폭이 왜 정장을 입는 이유를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도 그 이유는 딱히 모를 것이라 여겨지지요. 어떤 조폭 두목이 그 불편한 정장을 유니폼으로 먼저 제정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는지 저도 궁금하지요.


다만 추정컨대 직장인이 정장을 입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폭과 직장인은 하는 일만 조금 다르지 '조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폭도 '폭력' 전문직이라는 신뢰를 주기 위해 정장을 도입했을 것입니다. 허세 즉 일명 '가오'를 잡기 위해서 그럴듯한 복장이 필요했겠지요. 정장은 조폭이라는 신분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상대파에게 양아치가 아니라 조직화된 권위를 들어내기에도 눈에 띄게 좋아 보였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반대로 더욱 튀어 보였지만, 평범한 직장인과 같은 모습을 통해 경찰에게도 선함을 어필할 목적도 있었겠지요. 아니 그냥 어느 조폭 두목이 비싼 정장을 이유 없이 선호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긴 합니다. 그러다 마피아와 같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조폭의 정장은 영원한 유니폼으로 관습화가 됩니다. 사실 회장님의 차에 머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직장인의 모습은 조폭과 별 다를 바가 없지요.


정장을 입지 않을 권리


팀쿡과 잡스
젠슨 황

정장은 귀족의 격식 있는 복식에서 시작해 부와 전문성을 상징하는 옷차림이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입지 않을 권리'가 주어진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무엇을 입어도 되고, 무엇을 입으면 안 되는지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들이지요. 조폭의 두목이 정장을 공식 유니폼으로 정했듯이, 그들은 정장이 아닌 것을 내세워 조직의 힘을 과시하지요.

머스크와 트럼프

젤렌스키는 아무 힘도, 카드도 없었기에 정장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힘과 권력의 최상위 포식자는 "정장 따위는 개나 줘라"하고는 제 멋대로의 옷을 통해 강한 입지를 자랑합니다. 사과 장수 스티브 잡스는 정장은 고사하고 검은 목폴라와 금지 1순위 청바지만 주야장천 고집했지요. 엔비디아 젠슨 황은 그 대신 가죽 재킷을 입었습니다. 테슬라 머스크는 트럼프 앞에서도 정장은커녕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간을 봅니다. 다만 젤렌스키가 혼난 후 정장을 차려 입어 눈치 있는 모습도 보였지요. 조폭 두목도 회장님도 정장을 캐주얼하게 입고 넥타이는 정식으로 잘 매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목줄을 채우지 않음으로써 주인의 권리를 과시하지요. 그러고 보면 백바지를 입어서 눈총을 받았던 사건은 은연중 정장을 입지 않을 '능력'을 과시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정장을 입지 않는 슈퍼히어로



그러나 정장을 입지 않을 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의 최상위가 아니라 퇴직이라는 뜻하지 않는 상황에서 맞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옷을 벗는다'라고 하는 말은 그러한 사건을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지요. 불의의 사건 이후에도 계속 정장을 입어도 되지만 더 이상 잘 입지 않는 이유는 그 옷이 결코 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장은 알고 보면 무척 불편하고, 세상에는 그 보다 훨씬 편안한 옷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정장은 이제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매너를 위한 옷으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정장은 원래 자신을 위한 옷은 아닙니다. 매너를 지키기 위해, 즉 남들 보라고 상대방을 위해 애써 갖춰 입는 불편한 옷이지요. 슈퍼히어로들은 절대 정장을 입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옷에는 특수 기능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빌런과 맞서 싸우기에 전적으로 부적하다는 것을 재빨리 알았어야 합니다.


007


다만 정장을 입는 히어로의 부류가 딱 하나 있는데 생계형 히어로들입니다. 007 빵 제임스 본드와 킹스맨 시크릿에이전트는 그 신분이 명령권자가 있는 직장인인 만큼 정장을 필히 착용해야 하지요. 특히 킹스맨에서는 멋들어진 전통 영국 정장을 갖춰 입고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며 너스레를 떨지요.


하지만 정장이 매너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사람이 매너를 만들지요. 정장은 단지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매너는 그 정장 속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정장을 입어도 조폭은 조폭일 뿐이고, 정장을 벋고 사복을 입는다 해도 매너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 아무리 매너남이라 해도 예비군복을 입으면 경험상 개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이건 비밀인데 제가 바로 그랬었지요.

킹스맨

정장(正裝)이 항상 바른 복장이 아닌 것처럼, 사복(私服)이 사악(惡)한 옷은 아닐 것이지요. 그러나 오랜 시간 정장은 옳고 사복은 그른 것이라 하며 정장의 형식과 의례를 통해 사복과 전쟁을 벌여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정장은 남자들에게 더 가혹했는데, 정장은 군복의 연장선쯤으로 강요되어야 할 전투복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정장을 입으면 무조건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조직적 관계성을 명확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이쯤이면 조폭이 정장을 선택한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장은 지팡이를 잃고, 모자를 벗고, 조끼를 던져 버리고, 넥타이를 풀어헤쳐 끊임없이 그 허례를 하나둘씩 벗어왔습니다. 재킷마저 벗어 버리고, 바지까지 내리면 정장이 완전히 항복하는 단계에 이르리라고 생각됩니다. 더운 나라에서는 정장이라도 재킷을 입지 않고. 우스꽝스럽지만 반바지 정장도 등장한 것을 보면 정장이 백기를 올릴 날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먼 후 미래에는 "그렇게 불편한 옷을 도대체 왜 어떻게 입었을까?"라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우리가 살아있는 당분간은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국회에서 누가 정장을 입었네 말았네 할 것처럼, 직장에서 바즈니스 캐주얼을 입어라, 다시 정장을 입어라 할 것처럼, 정장 수영복이 나오기 전까지는 '정장 전쟁'은 계속될 터이지요. 입기도 벗기도 뭐한 애증의 정장사는 그래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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