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 직장인도 벌벌 떨게 만드는 교통비가 주는 교훈
편도 교통비 1,450원. 편의점에서 통신사 할인을 받아야만 더 묵직한 삼각김밥을 사 먹을 수 있는 금액이다. 띡- 지하철역 개찰구에 선명하게 찍히는 빨간색의 디지털 숫자가 마치 하루 생활비를 말해 주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집 근처 편의점을 서성이며 김밥 하나 제 돈 주고 사 먹는 것을 아까워하기 일쑤다.
사 먹지 못하는 것과 사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깝다는 생각에 사 먹지 않는 것에는 묘한 차이가 있다. 띡- 계산대 위 탁한 초록빛 조끼에 빛바랜 명찰을 단 동지가 바코드를 찍자 화면에 비치는 검은색의 디지털 숫자는 오버랩되어 여전히 개찰구 안 가림막처럼 3년차 직장인의 지갑을 막아선다. 참 아이러니하다.
어렸을 때부터 절약을 습관화했던 나는 교통비를 제일 아까워했다. 도보로 50분 가량 소요되는 학교를 다닐 때도 새벽같이 일어나 걸어서 등교를 하고,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후에는 가로등 불빛 하나에 의존하며 걸어서 하교를 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묵묵히 걸었다. 누가 보면 미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루하루 두 다리로 나의 길을 걷는 것이 어린 날의 자부심이었다.
어느덧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세월과 함께 물리적인 거리도 늘어났다. 어린 날의 패기로도 감당할 수 없는 통근 거리는 익숙해질 만하면서도 발목을 잡는다.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가 들이닥치거나 전동 열차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두 다리도 한 순간 꼼짝없이 묶여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전진할 수 있는 이유는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나 자신에게 치여도 다시금 묵묵히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의 대상은 시시각각 바뀐다. 고된 일주일의 달콤함을 맛보게 해 주는 실체 없는 '불금'일 수도 있고, 난생 처음 콘서트를 다녀왔다며 인증 사진을 보내 주는 엄마의 '메시지'일 수도 있고, 군말 없이 품을 내어 주는 따뜻한 '인연'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하나의 입김에도 쉬이 흔들리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버팀목이 많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 터.
목적지는 변경되었을지언정 여전히 묵묵히 두 다리로 나의 길을 걷는 현재의 어린 날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