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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Apr 23. 2023

필사를 하기 위해 비싼 노트를 샀다

진초록색 노트는 단단한 도토리예요

필사를 시작했다.

필사를 하게 된 계기는 그냥, 무엇이든 남기고 싶었다. 잊혀가는 기억을 조금이라도 부여잡고 싶은 마음이랄까.

지금까지 A5 스프링으로 만들어진 노트에 필사를 했다. 노트 페이지가 고작 40쪽 정도라 휴대하기 편했다. 노트를 사용하다가 서체가 마음에 안 들 때는 종이를 박박 뜯어서 휴지통에 던져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내가 봄바람 불듯 필사 노트 바람이 일렁이더니 조금 더 좋은 노트를 갖고 싶었다. 필사인들이 추천하는 노트를 찾아보며 어떤 노트가 내게 제격일지 고민했다. 그들 중 소수는 나처럼 작은 연습장으로 끄적이는 사람도 있었고 다양한 색깔 양장으로 된 표지에 멋진 서로 필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필사챌린지를 했고, 체크 리스트에 그날그날 실천한 기록도 잊지 않았다. 아이코! 필사가 그냥 필사가 아니었구나!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펜으로 옮겨 적는 행위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 책 속 수많은 내용 중 단 몇 구절을 추스르는 일은 가을철 수 십 개 도토리 중 가장 단단하게 잘 영근 도토리를 발견하는 다람쥐와 같았다. 나는 책 다람쥐가 되었고 더 맛있는 도토리를 선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았다. 아직은 어떤 도토리가 최고인지 가늠하는 게 지않았다.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출근 전 아침시간뿐이었다. 여섯 살 남자 쌍둥이가 언제든 토끼눈을 뜨고 내게 달려들 자세를 취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직장에서는 늘 매시간마다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여유 있게 책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은 유일하게 점심시간뿐이었는데, 그 시간만큼은 친한 언니와 산책을 하며 이야기 나누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면 힘든 일도 연기처럼 퐁하고 사라지는 걸 경험한다. 저녁시간은 아이들 어린이집 하원 후 식사준비를 하고 청소를 하다 보면 어느새  9시가 된다. 씻고 집안정리를 마친 시간은 10시다. 책을 좀 볼까 하고 책장을 여는 순간, 글자가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순간 나는 레드썬! 당신은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마주합니다. 그렇게 저녁 독서는 질 좋은 수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조금 이른 아침, 가족모두가 단잠에 취해있을 시간에 눈을 뜬다. 이 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고요한 시간이요, 독서를 하기 위한 최적의 시간이었다. 물 한 잔을 마시고 씻고 출근준비를 마친다. 아삭거리는 사과를 먹고 식탁서재에 앉는 평균시간은 아침 5시 20분경. 출근시간까지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 책을 펼친다. 글자들이 눈앞에 별처럼 쏟아진다. 때로는 책을 읽으며 머릿속이 텅 벼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때도, 어느때는 마음속 거울을 들쳐보는 듯 슬픈 마음이 들어 눈물이 찔끔거릴 때도 있었다. 아 , 이런 묘한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책은 이런 묘한 찰나를 원한 깊이 신기한 세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 책을 읽으며 이곳도 마음에 들고 저곳도 마음에 들어서 열심히 밑줄을 그었더니 필사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필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 이 정도 양을 필사하려면 10분이 아니라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책을 읽기 위해 필사를 하는 것인가, 필사를 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인가. 이 두 가지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내게 조경국 작가의 <필사의 기초>에 해답이 나온다.


끈기를 얻기 위해선 무엇보다 '재미'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재미없는 일을 붙잡고 오래 유지한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필사의 재미를 느끼려면 책 읽는 재미를 알아야 합니다..'책 읽는 쾌락주의자'가 먼저 되어야 하죠.
p.39,60


멋진 필사보다 중요한 건 '책 읽는 쾌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필사가 먼저가 아니라 책 읽는 행위에 재미를 느끼면 필사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재미를 느끼면 무엇이든 기록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상태가 올 수 있다는 말이다. 필사를 하기 위해 안달 난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이었다.


며칠 후 주문했던 진초록색 필사노트가 도착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살짝 어둡기는 하지만, 노트를 보면 저절로 마음이 힐링된다. 한 그루 나무가 떠오른다. 노트를 보면 쨍한 초록나무 같다. 마음이 설렌다. 수많은 색연필 중에 초록색 색연필을 꺼내든다. 진초록색 노트와 초록색 색연필 궁합이 꽤 흥미롭다. 이른 새벽 마음의 등불을  밝혀 줄 안내자 같은 역할을 하게 될 초록 초록한 문구들 사이에서 오늘도 나는다람쥐가 되어 꼬리를 팔랑이며 독서사냥을 시작한다.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내가 이렇게 책을 읽고 필사를 하는 취미를 가질 줄을. 온갖 잡동사니에 쌓여 빈틈이라고는 없을 식탁대신,  노트북, 책과 노트가 늘 올려져 있을 줄을. 집안 한 곳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 생길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매일 아침, 이런 공간에서 꿈을 계획하고 상상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자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사소한 실천이 주는 작은 성장이 나를 더욱 앞니가 튼튼한 다람쥐로 만들어준다. 내일은 어떤 도토리 사냥을 떠나볼까.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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