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대로 일 년만 가볼까요

by 김세인

저녁 7시 즈음 나는 식탁에 앉아 빨간 돌돌이 색연필을 들고 대기 중이었다. 아이가 수학 문제집을 풀어 오면 빨간색으로 채점을 하고,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오면 초록 색연필로 표시할 참이었다.


‘밖에서 한바탕 축구를 하고 왔으니 이제 약속대로 수학 문제를 잘 풀겠지’라고 기대한 건 엄마의 오산이었다. 아이는 태연하게 만화책을 한 권 꺼내 들더니 소파로 향했다. 5분을 기다리고, 10분을 기다리다 슬슬 화가 올라오려 하는데 ‘띠띠’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제 핸드폰까지 만지작거리는 꼴을 보니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째려보는 눈빛을 느꼈는지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나 학교 숙제하는 건데.”

수학 학원은 쉬고 싶다더니 이제 집에서 문제집도 안 풀고, 엄마한테 핑계나 대고 그렇게 할 거면 다시 학원으로 가라고 폭풍 잔소리가 나오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무슨 숙제?”

“선생님이 ‘하루에 40분 독서하기’ 숙제 내주셨어.”

수학 익힘책 풀기 숙제는 많이 들어봤어도 독서 숙제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렸다. 순간 나는 ‘하아.. 수학 공부해야 할 시간인데’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40분씩이나 책을 읽고 나면 피곤하다 할 테고, 수학 문제는 풀기 싫어질 테고, 그러면 짜증이 낼 게 뻔하다. 숙제 먼저 하고 할 테니 걱정 마라는 아들의 말에 차마 순서를 바꾸라고 으름장을 놓지는 못했다.


늘 학원보다 학교 숙제, 학교 공부가 먼저라고 했던 나의 말풍선들이 하필 지금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시키는 건 학원을 안 가는 대신 하는 학원 숙제나 다름없었고, 독서 숙제는 학교 선생님이 내 주신 거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아이는 타이머가 울리면 알림장에 책을 읽었다는 표시를 하고, 책을 덮곤 했다. 아이는 만화책, 동화책들을 소파에 쌓아두고 마치 업무를 하는 회사원처럼 책을 읽었다. 그 모습이 어색하고, 인위적이라 나는 그렇게 안 해도 된다고 말하려다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났다. 날이 갈수록 소파에 앉은 아이의 자세가 몰랑몰랑해지고 한껏 꼬은 발이 자연스러워졌다. 소파 옆 테이블에는 매일 다른 주전부리가 놓이고 요구르트에 빨대가 꽂혀 있었다. 어떤 날은 킥킥거리고 웃기도 하고, 어떤 날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기도 했다. 나는 방으로 치웠던 회전책장을 거실 소파 옆으로 옮겨두었다. 타이머가 울리면 ‘숙제 끝’ 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턴가 타이머가 울려도 끄고 그대로 책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나에게 독서노트를 내밀었다. 여태껏 학교에서 상장을 타겠다고 책 제목과 책 속 한 문장을 황급히 작성하는 모습은 봤지만 독후감을 쓴 건 처음 봤다. 독후감은 쓰고 싶은 사람만 쓴다고 했다. 공책에는 아이가 또박또박 눌러쓴 글이 한 페이지의 절반쯤 채워져 있었고, 선생님이 쓰신 듯한 밑줄과 메모가 있었다. 줄 바꿈, 인상적인 부분 추가하기, 이유를 적어보기 같은 선생님의 손글씨가 있었다.


스스로가 아니라 시켜서 하는 독서가 자칫 아이에게 독서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 나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태생적으로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고 독서에 적합하게 진화하지 않았다. 책을 읽어 지혜로운 자가 된 게 아니라서 그 후손들은 그냥 놓아두면 자연스럽게 책을 읽지 않는다.
『어른의 어휘력』 p. 19


나 또한 책 몇 페이지를 집중해서 잘 읽지 못한다. 자꾸 챕터가 언제 끝나는지 페이지를 넘겨보고, 카카오톡에 답장을 하고, 유튜브를 켠다. 책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아이들에게는 책 보다 재미있는 놀거리들이 너무 많다. 누군가 소리 내어 책의 첫 페이지를 읽어주거나 주옥같은 작품들을 이야기해 주거나 숙제로 읽어보자고 캠페인을 벌이지 않고 그냥 놓아두면 아이들은 책을 읽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 책으로도 놀 수 있다는 그 마음이 들 때까지 응원하는 누군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이의 담임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대로 좀 더 가볼까요.
수학 선행은 잠시 내려놓고 독서의 향연에 빠져들게 해 볼까요.
아직 4학년이니까요.
아이들에게 아무 대가도 바라지 말고 우리 그렇게 해볼까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침 독서시간에 책을 읽는 아이들의 눈빛과 꾹꾹 눌러쓴 독서록을 보면 담임선생님에게 나의 마음이 전달될 것이다.


얇은 책만 찾던 아이가 며칠 전 학교에 가져가겠다며 두께가 있는 책을 찾았다. 평소처럼 글자가 크거나 글밥이 별로 없거나 제목이 재미없을 거 같다거나 한 건 안중에 없어 보였다. 오직 페이지 수가 많은 두꺼운 책을 찾는 눈치였다. 『코스모스』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책장을 뒤져봤다. 꽤 두께가 있지만 팝업북이라 너무 딱딱하지 않은 『해리포터』를 찾았다. 287쪽 정도 되는데 괜찮겠냐는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의 가방이 빵빵하게 터질 듯했다. 아침에 가져간 두꺼운 책 덕분이다.

“이 책 너무 무거운데 집에서 읽지 그래? 그리고 너 해리포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안 돼 엄마! 이거 보고 선생님이랑 애들이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냐고 엄청 놀랬다니까.”


형들이 읽을 법한 책 비주얼 덕분에 들썩들썩했을 아이의 어깨와 속으로 지었을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4학년 어린이의 허세가 귀여워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새 학기인지라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지킨 숙제 약속이라도, 그 열정과 허세가 일 년이 아니라 한 달만 간다 해도 감사하다. 독서의 여운이 남아 머리에선 삼국지 속 유비와 조조가 칼싸움을 하고, 쾌걸 조로리의 장난기가 옮아 책상에서 까불까불할지 모른다. 그리하여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조금 지장이 생길지라도 나는 타이머가 아이에게 안겨줄 황홀의 시간을 믿어보기로 했다.


저녁 7시.

나는 빨강 색연필 대신 여태 미루며 못 읽었던 『소로의 문장들』을 손에 들고 있다.

나도 타이머를 켜볼까 싶다. 전날 벼락치기로 읽고 가던 독서모임에 다음 달에는 책을 다 읽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