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식 시험은 왜 배움을 망치는가

by 미냉

여러분은 학창 시절 시험을 어떻게 보셨나요? 아마 대부분 객관식 오지선다형 문제였을 겁니다. 지문이 주어지고 그 아래 다섯 개의 선지가 놓여 있죠. "다음 중 적절하지 않은 것은?" 우리는 이런 방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객관식 오지선다형 문제를 통해 배움을 평가하는 방식이 왜 문제가 있는지 구체적인 예를 통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배웠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시를 처음 읽는 학생이라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님')이 떠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립다는 것. 이것이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만 알아도 이 시를 상당 부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수업에서는 이 시가 단순히 "님이 그립다"고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그 마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지를 다룹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들입니다.


여성 화자의 목소리로 애절함을 표현한다

리듬을 만들어 노래처럼 흥을 살린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역설로 오히려 슬픔을 강조한다


이런 내용들을 배우고 나면, 객관식 시험에서는 이런 설명들을 선지로 만들어 "이 시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은?" 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은?"을 묻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방식의 문제는 학생들에게 너무 익숙합니다. 「진달래꽃」은 유명한 작품이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며, 이미 수없이 출제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런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고 쉽게 답을 맞힙니다.

절대평가라면 "이 정도 이해했으면 통과"라고 판정하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하지만 변별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다릅니다. 출제자는 "이렇게 물어도 맞힐 수 있을까?" "이것까지도 알고 있을까?"를 계속 확인하며 어떻게든 틀리는 학생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헷갈리는 문제를 잘 만든 교사일수록 칭찬받습니다. 반대로 학생들이 모두 잘 맞힌 시험은 "변별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때문에 출제자는 주로 두가지 방향으로 변별력을 확보합니다.

첫째,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지만 미묘하게 틀린 선지를 만듭니다. 예를 들어 "시적 화자는 님이 나에게 고통을 주려는 마음조차 긍정하고 있다" 같은 선지입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를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님이 고통을 '주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시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틀렸지만, 헷갈립니다.

둘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는 않지만 학생들이 잘 모를 법한 지엽적인 부분을 묻습니다. 꽃을 뿌려 공경을 표하는 불교 의식 '산화공덕'에 대해 깊숙히 물어본다거나 역설법의 세부 분류 중에 이 시에 쓰인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식이시죠. 때로는 시인의 삶이나 다른 작품을 끌어오기도 합니다.

이는 문학뿐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에서 사건의 의미는 묻지 않고 연도를 묻고, 과학에서 원리는 묻지 않고 용어를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 알고 있으니 지엽적인 것으로 변별해야 하는 겁니다.


또한 객관식의 문제 중 하나는 실수의 대가를 굉장히 크게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헷갈리거나 문제를 잘못 읽으면 점수를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부분 점수가 없습니다. 0점 아니면 만점이죠. 오히려 깊이 이해할수록 오히려 문제가 더 헷갈리기도 합니다. "이 해석도 가능한데, 저 해석도 가능한데..." 고민하다가 틀립니다. 반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패턴대로 선지를 소거한 학생이 맞습니다. 이해와 정답 찾기가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결국 이러한 평가방식은 수업을 왜곡시킵니다. 교사는 작품을 깊이 해석하는 대신 "이런 선지가 나오면 함정"이라고 가르치게 됩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하면 학생들은 "시험에 안 나오겠구나"라고 받아들입니다. 학원에서도 "이런 표현이 나오면 주의하세요"를 가르칩니다. 학생들은 점점 더 정교하게 함정을 피하는 법을 배웁니다. 끝에 가서는 정말 중요한 부분—핵심 주제나 의미—은 하나도 안 묻습니다. 다 알고 있을 테니까요. 오직 지엽적인 부분, 헷갈리기 쉬운 부분만 출제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평가했다면 어땠을까요?

"이 시에서 화자의 심리를 자신의 말로 설명해 보세요"라고 구술 평가나 서술형 평가를 해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이별의 정서를 담은 시를 직접 써보세요"라고 창작 과제를 낼 수도 있습니다. "시인에게 편지를 써서, 이 시를 읽고 느낀 점을 전해보세요"라는 식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죠. 이런 평가에서는 학생이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자기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함정 선지'로 학생을 헷갈리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객관식 시험은 이제 정말 한계에 달했습니다. 아무리 선지를 꼬아도, 아무리 지엽적인 내용을 찾아도 더 이상 새로운 문제를 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달래꽃」 같은 중요한 작품은 앞으로 수능과 같은 시험에 출제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변별을 하려면 알려지지 않은 더 마이너 작품을 발굴해야 하니까요.


객관식은 맞고 틀림을 구분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러나 진짜 배움은 맞고 틀림이 아니라 이해의 깊이에서 나옵니다. "정답을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배웁니다. 이해하는 법이 아니라, 시험 문제 푸는 법을. 생각하는 법이 아니라, 선지를 소거하는 법을. 자기 해석을 만드는 법이 아니라, 출제자가 원하는 답을 찾는 법을. 객관식 오지선다형이라는 형식은 이미 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평가는, 그리고 수업은, 맞고 틀림을 가리는 데서 벗어나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는 다른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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