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그리고 포기의 문법
고등학교 3학년 첫학기가 시작되고 한달쯤 지났을 무렵입니다. 반의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찾아와서 물었죠. "선생님, 미술 시간에 다른 공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했어요. 수능 과목 공부를 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사실 저한테 허락을 받을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해도 되는지 결정하는건 미술선생님이니까요. 제가 고민해야할 부분은 이 친구가 미술 선생님에게 허락을 구하는걸 허락할지 아니면 제가 컷해야할지 하는 문제였습니다. 수능이 다가오면 자연스레 자습이 많아지긴 하지만 꽤 이른 타이밍이라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고민 끝에 허락을 구해보라고 했지요.
시간이 조금 더 흘러 6월 모의고사가 끝나고 같은 학생이 또 찾아왔어요. 이번엔 수학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최저가 3개 과목 합 12이면, 국어 영어 탐구 하나만 해도 되잖아요. 선택과 집중이에요. 3과목에만 집중하면 성적 오를 거예요." 본인 딴에는 논리적이었습니다. 필요없는 과목은 배제하고 본인에게 딱 필요한 것들만 추려서 집중하겠다는 얘기였죠. 결과는 어땠을까요? 포기한 만큼 포기하지 않은 과목들의 성적이 올라갔을까요? 그 학생은 두 병에 나누어 붓던 물을 한병에 쏟아부은 것처럼 성적이 오르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각보다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제가 겪은 바로는 포기한 과목의 성적은 대부분 빠르게 떨어지고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지만 선택받은 과목의 극적인 상승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왜 그런지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나름대로 분석해본 결과 어느 정도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공짜로 얻어낸 시간은 간절하게 쓰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추가로 생긴 시간인데 조금 쉬어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죠. A과목 하나, B과목 하나 공부할 시간이 B과목 공부 조금 더 하고 쉴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두 번째로 하루에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대략 10시간 정도라고 치면, 그걸 서너과목에 모두 쏟아붓는건 조금 과잉입니다. 공부하는 과목을 바꿀 때마다 어느 정도 리프레쉬가 되지만 한 과목을 세시간씩이나 붙잡고 있는건 상당히 지루하고 비효율적이죠. 세 번째로 포기라는 전략이 항상 머릿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효율적으로, 더 깊게 공부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보다는 어느 시간을 또 덜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면서 일종의 흐름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미래가 100% 정해진 것은 아니니 교사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사실 가장 기본적인 루트는 간단합니다. 충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면서 수능 공부도 짬짬이 하는 거죠. 그러면 수시에서 종합전형(생기부 반영)과 교과전형(수능최저가 있는)을 골고루 지원할 수 있고, 혹시 실패하면 정시라는 보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집중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나씩 포기할 때마다 선택지가 줄어듭니다.
무서운 것은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포기'가 전략의 언어를 입고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는 점입니다. 학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배울 내용을 '대입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따라 나누기 시작합니다. 본인이 좋아하지 않거나 힘든 활동들은 곧잘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려납니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깊은 몰입이 아니라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다는 가벼운 태도입니다. 점점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라기보다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장소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경우 학생들을 실제로 지탱해주는 힘은 당장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내 취향과 맞지 않아도, 지금의 목표와 직접 연결되지 않아도 주어진 시간을 끝까지 견디고 완주해본 경험 말입니다. 사실 뭔가를 해내기 전부터 쓸모를 판단하는건 어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계속해서 시작도 하기전에 쓸모를 따지며 덜어내는 데 익숙해진 학생은 정작 가장 버텨야 할 순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내려놓게 될 위험에 놓이기도 합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다만 그 말이 반복되는 동안 점수로 남지 않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아이들에게 성적을 올리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까요, 아니면 가치있는 시간과 조용히 이별하는 법을 익히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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