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인간은 이상적 군주가 될 수 있을까?

by 미냉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소설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일본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이 장편소설은 먼 미래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삼국지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핵심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민주주의와 전제군주제라는 정치시스템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작품은 두 거대한 세력,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의 대결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흔히 "이상적 절대군주제와 부패한 민주주의의 대결"로 읽힙니다.

주인공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통치자입니다. 그는 천재적 전략가이자 청렴한 혁명가이며, 사적인 욕망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통치는 냉철하면서도 이상주의적입니다. 지도자로서의 단점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런 라인하르트라도 우리 시대의 이상적 군주는 될 수 없습니다.


1. 완벽한 개인도 통제할 수 없는 복잡성

그 이유는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세계의 복잡성에 있습니다. 미래까지 갈 것도 없이 현대 사회만 보아도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정보, 생태 등 수백 개 영역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전체를 한 인간이 '판단력'과 '의지'만으로 통제한다는 발상은 이미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설령 완벽한 인간이 존재하더라도 그는 불완전한 시스템의 일부로서 제한된 정보와 시야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은하영웅전설>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라인하르트

"만약 정말로 청렴하고 천재적인 지도자가 존재한다면, 민주주의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1년 예산은 약 600조 원에 이릅니다. 이를 100억 원 단위로 쪼개도 6만 개의 항목이 됩니다. 그 모든 예산 편성과 집행 내역, 보고서를 한 사람이 전부 검토할 수 있을까요? 어떤 천재적 인물이 24시간을 모두 바친다 해도 그러한 양의 정보를 처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복잡성이란 단순히 양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많은 요소가 서로 얽혀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 체계의 속성입니다. 단순히 복잡하기만한 미로가 아니라 그 미로가 살아움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지요. 경제 정책 하나가 고용, 물가, 국제 무역에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그 파급은 다시 문화와 여론을 거쳐 정치로 돌아옵니다. 통치는 통제가 아니라 조율이며, 천재의 통찰은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이 모든 흐름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세종은 지금보다 훨씬 덜 복잡한, 조선 초에 임금이었는데도 정치를 하느라 몸이 상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세요. 결국 완벽한 인간이더라도 이상적 절대 군주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세계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2. 민주주의의 딜레마: 숙의를 삼켜버린 가속의 시대

그렇다면 권력을 나누는 민주주의는 어떨까요? 복잡성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대응은 권한과 정보를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각자의 영역에서 판단하고, 서로를 견제하며, 다양한 목소리가 충돌하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시스템. 그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입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조차 지금의 복잡성 앞에서는 버거워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부패나 무능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속도입니다. 기후 위기, AI 규제, 부동산 정책, 교육 개혁, 국제 정세 — 이 모든 사안이 동시에 발생하고 서로 얽히며 실시간으로 변화합니다. 하지만 시민이 그 모든 문제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 명의 천재가 모든 정보를 감당할 수 없듯이, 수많은 시민의 의사가 제대로 모이고 숙의될 여유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흔히들 "한국은 정치만 빼면 완벽하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문제를 정치인의 인성이나 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설령 청렴하고 유능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당선된다 해도,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거대한 예산,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 정세입니다. 그 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도출하고, 동료 의원들을 설득하며, 각기 다른 이해를 조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좋은 사람'으로 바꾼다고 이 구조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언론은 눈이 갈 만한 이슈를 선별한 뒤, 복잡한 문제들을 단순한 찬반 구도로 압축하여 전달하고, 대중은 그에 감정적으로 반응 할 뿐 깊이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정치권은 여론의 순간적 압력에 끌려다니며 장기적 안목 대신 즉흥적 결정을 반복합니다. 결국 우리는 민의가 제대로 모이기엔 너무 빠르고, 숙의가 이루어지기엔 너무 복잡한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도 속의 사람들이 무능하고 부패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천재도 모든 정보를 감당할 수는 없듯, 민주주의 역시 이제 모두의 의견을 모으고 조율할 여유를 잃고 있습니다.


3. AI — 효율의 유혹과 새로운 위험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에게 답을 구할 수 있을까요?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고, 피로하지 않으며, 사적 이해관계에도 얽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완벽한 행정'의 가능성을 봅니다.

AI는 데이터를 분석해서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가'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효율만을 따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비효율적이더라도 지역 균형을 택하고, 경제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아도 공동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킵니다. 심지어 어쩌면 정의롭지 않아 보일지라도 그것이 민의라면 반영되어야 합니다. AI는 이런 선택을 이해할 수 없고, 정치를 계산과 관리로 축소시킬 뿐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책임의 공백입니다. AI가 결정에 참여할수록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습니다. 정치는 본래 실패를 통해 학습하는 인간의 제도입니다. 시행착오 속에서 한계를 자각하고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AI에게 결정을 맡기면 학습의 주체가 인간에서 AI로 넘어갑니다. 사회는 효율적으로 작동해도 인간은 더 이상 배우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AI는 자연 발생한 이성의 신이 아닙니다. 인간이, 더 정확히는 기업이 만든 산물입니다. 데이터는 누군가 선택했고, 시스템은 누군가 설계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온라인 추천 기능이 우리의 선택을 은밀히 유도한다는 것을 압니다. 통치에 AI가 개입할 때, 그것이 정말 중립적 효율일까요? 아니면 AI를 소유한 자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일까요? 부패한 인간을 대체한다고 부패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부패의 형태가 더 보이지 않게 변할 뿐입니다.


4. 정답이 아닌 더 나은 질문을 향해

완벽한 개인은 복잡성을 통제할 수 없고, 민주주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며, AI는 중립적 해법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입니다. AI를 누가, 어떤 원칙으로, 어떤 감시 아래 운영할 것인가? 민주주의가 느린 대신 얻는 것—숙의, 견제, 책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복잡성의 시대에 시민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 그리고 근본적으로, 통치란 과연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협상'되어야 하는 것인가?

《은하영웅전설》이 꿈꾼 것이 완벽한 군주의 통치였다면, 우리가 마주한 것은 더 깊은 문제입니다. 답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하거나 효율에만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정치 그 자체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를 잃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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