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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May 05. 2023

비 오는 날의 산책

 비가 오면 바깥의 모든 것이 칙칙하고 우울해 보이고, 슬프거나 외롭다고 한다. 

아마, 조금 더 조용해진 느낌이 들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내게는 비 오는 날에도, 아니 비 오는 날이야말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참 많다.

빗물에 미끄러지는 아이의 슬리퍼 끄는 소리,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 빗방울 소리 등 내게 편안함을 주는 것들이다. 특히 빗물과 관련된 것들은 생각만 해도 좋다. 현대의 주택 구조상 따닥, 따닥, 따다 다닥...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려줄 양철지붕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 해도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마치 친한 친구가 내게 노크하는 듯하다. 


"이안, 나야! 문 열어 줘, 나 왔어."


빗방울이 달려오듯 친구도 성큼 내게로 왔다.

이것은 지극히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 정도라도 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어딘가.


소리를 만나러 밖으로 나가본다. 올려다본 회색 하늘은 오히려 집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책이나 영화를 보며 따스한 온기가 감싸주는 방 안에서 뒹굴거리고 싶게 만든다. 킥킥 거리며 웃을 수 있는 만화책, 따뜻한 이불속,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을 수 있는 코믹 영화를 보거나 유튜브 서핑... 그리고 빗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더 중요한 것을 빼놓았다. 향기 좋은 커피. 커피의 귀부인이라는 예가체프도 좋지만, 신맛이 더 강하고 묵직하게 느껴지는 '시다모'를 내린다. 비 오는 날의 커피는 비를 머금은 흙냄새와 어우러져 그 향기가 극대화된다. 마침내 비와 함께 방바닥에 짙은 향기로 내려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서 산책하고 싶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욕구, 색다른 산책의 매력이 나를 기어이 밖으로 불러 내고야 만다.    

 비에는 마법의 힘이 있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 젖은 흙과 나뭇잎의 냄새, 빗방울이 피부에 닿는 느낌 등 모든 것이 상쾌하게 나를 일깨운다.  

   







비가 오는 날은 왠지 잠자던 촉수가 기지개를 켜고 말미잘처럼 뻗어 나온다. 빗속을 걸으며 듣는 새소리, 활짝 핀 채로 아무렇게나 접혀 버린 꽃잎의 얼굴들,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도 다르다.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자연과 한 뼘 더 가까이 연결되는 듯한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비 오는 날의 산책은 자연스레 마음이 비워진다. 내 안의 소리가 더 잘 들린다. 빗물 소리는 나의 깊은 곳까지 정화시켜 편안하고 느긋하게 만든다. 빗속을 걸으며 어느덧 걱정 같은 것들은 다 잠재워지고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나'를 느끼게 된다. 

비 오는 날의 산책은 화창한 날 햇빛으로 분산되어 주변으로 돌렸던 시선을 온전히 내 안으로 데려와 준다. 나의 마음을 맑게 해 주고 나에게 더 몰두하게 된다.



"호우 경보, 산사태, 상습 침수 등 위험지역 대피
외출 자제등 안전에 주의 바랍니다."

라는 몇 번의 안내 문자가 뜨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비 오는 날을 위해 준비해 둔 진 분홍 장화, 다섯 명 정도는 충분히 가려 줄 만한 크기의 우산까지 챙기고 굳이 길을 나섰다. 비를 잔뜩 품고 있노라고 짙은 농도의 잿빛 하늘이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구름이 불러내는 대로 흙냄새, 풀 냄새 맡으며 오롯이 나만의 느낌에 꽂힌 채 더디지도, 급하지도 않은 길을 걷고 있었다.

채 10분이나 되었을까. 바람이 홱, 하고 커다란 우산을 뒤집더니 나까지 채갈 듯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돌아가자.





그렇게 오늘의 산책은 아쉬움을 남긴 채, 세찬 바람에 맞서지 않기로 했다. 우산도, 마음도 같이 접어서 일단정지다. 진 분홍 장화의 발걸음이 재빨라진다. 

더 많이 걷지 못한 미련은 '시다모'의 진한 향기와 맛으로 달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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