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늦은 봄, OOO미술관이 공간을 새로 확장해서 기획한 전시였다. 당시 설치 작업을 하고 있던 나는 전시를 앞두고 설치 일정을 잡아야 했다. 설치 작품은 전시공간에 직접 설치를 해야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번 전시는 공간 작업이기에, 그전에 미술관을 방문해 설치할 위치를 확인하고, 벽면 길이와 높이, 공간의 폭..등을 체크한다. 설치 작업에서 이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큐레이터와 일정을 잡는데, 여러 작가들이 설치를 하기에 조율이 필요했다.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천장 높이를 두배 이상 높이고, 공간도 새로 넓게 조정했기에, 특별 장비와 인력이 필요했다. 날짜와 시간을 대충 맞추었고, 그날은 약속한 설치 날이었다.
보통 일찍 서두르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늦었고 길까지 막혔다. 일정보다 늦게 도착하니 이미 많은 작가들이 설치하고 있었고, 설치를 막 끝낸 작가도 보였다. 먼저 설치한 작가들 작품을 둘러보고 있는데, 저쪽 끝에 한 작가가 설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국수 작업이었다. 작가가 직접 설치하는 것은 보지 못했기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조 성묵 작가는 식용 국수로 갈대같은 풍경과 오브제를 만드는 작가이다. 작가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치한 지 며칠 되었다고 했다. 지금은 작고하셨는데 당시에도 연세가 많았다. 연로한 작가가 조수도 없이 매일 나와 설치한다는 말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국수는 일반 우리가 집에서 먹는 식용국수이다. 국수 가락을 하나하나 세워서 갈대밭 같은 풍경을 만드는 것이니 노동 양이 만만치 않았다. 옆에 국수가 수북이 몇 박스 쌓여 있었다.
이미 설치를 완료한 작가들도 있었다. 전체 공간을 둘러본 후에 내 공간에서 벽면에 작업을 시작하려고 준비해온 재료들을 꺼내고 있었다. 일단은 사다리와 리프트가 필요했다. 막 설치를 시작하려는 데, 갑자기 스프링클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간에 흰 가루가 뿌려졌다. 앞이 뿌예진다. 동시에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린다.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나가라고 한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위급한 느낌이 들어 급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다른 작가들과 큐레이터, 스텝들도 건물 밖으로 나왔다. 미술관은 보통 작품에 손상이 가지 않게 스프링클러에서 물 대신 안개 같은 흰 가루가 나온다.
건물 밖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웅성대며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나도 걱정이 되면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불이 났으면 정말 큰일인것이다. 다행히 화재는 아니었고, 다른 문제로 스프링클러가 오작동했던 것이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난 기절했다. 스프링클러로 인하여 이미 설치한 작업들이 파손 된 것이다. 파손된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반 이상 작품이 없어진 작가도 있었다. 다른 작가들도 걱정이 되었지만, 조성묵 작가가 특히 걱정이 됐다. 그런데, 오늘은 설치를 더 이상 못한다고 했다. 다음날 다시 와야 했다.
난 다행히 일찍 설치를 시작하지 않아 그날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전시 오픈 날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오프닝에 많은 사람들이 왔고, 오프닝은 성대하게 치뤄졌다. 사실 그날 일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몇몇 작가 밖에 모르는 일이다. 나중에 전해 들은 얘기로는 조성묵 작가 작업은 보조 인력이 파손 된 부분을 도와서 설치를 마무리하였고, 대부분 작가들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왜냐면 보통 평면 회화 작업은 전시할 때 작품 가를 먼저 알려주어 보험과 운송 가격이 책정 되지만, 설치 작업같은 경우는 책정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 보상도 애매 했을 것이다.
그날 늦은 건 당시에는 불운이었지만 늦었기 때문에 피해를 줄인 걸 보면 불운이 꼭 불운한 건 아니란 생각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운과 행운이 앞뒤에 붙어 있어서, 불운이 때로는 행운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