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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10. 2024

웬만해선 철수하지 않는다

  어젯밤에 비가 제법 퍼부었잖아. 배추작업반들이 일하고 있는데 걱정이 돼서 나가 봤지. 와, 이 사람들 독종이더라고. 머리에 랜턴을 쓰고 계속 일하고 있는 거야. 마침 작업반장들도 나와 있어서 언제까지 작업할 거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이 정도 비에는 작업을 한다고 그러더라. 작업반장들 참 지독하지 않냐. 남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들은 그걸 버텨내겠나 싶더라고.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장 굶어 죽어도 이런 노동은 안 하잖아. 이런 중노동을 누가 버텨내겠니. 외국인노동자 없으면 농산물이 우리 밥상으로 올라오지도 못한다고 말들 하잖아. 다들 골병이 들어도 버티는 거겠지.


  나는 전날 한 씨 일행들이 날씨를 좀 지켜보다가 일을 하기로 하고 배추작업반들을 움직이기 위해 숙소를 나서던 모습이 떠올랐다. 준표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기 밭의 배추 수확이 잘 돼 가는지 궁금해서 현장을 둘러보고 온 것이다. 그리고 밭떼기로 넘긴 자신의 배추밭에서 투이가 연신 배추를 베어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 친구 라면이 지렁이처럼 불어 있었다. 가뜩이나 밤새 내린 비로 습해진 날씨인데다, 국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불어 있는 라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맛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몇 번 느직느직 젓가락질하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각자 어떤 생각의 언저리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시선을 비켜나갔다. 나처럼 준표도 투이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밭 뒤쪽으로 펼쳐진 서쪽 산 능선 위에 걸려 있는, 구름 사이로 보랏빛 노을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낼 때가 일하기엔 가장 좋은 시간 때다. 배추작업반들은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 일 나가는 시간이 조금씩 달라졌으므로, 일 나가기 전에 먹는 밥이 곧 저녁이 된다. 작업은 햇볕이 약해질 무렵에 시작되어 다음 날 동이 터서 땡볕이 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비가 오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면서 일을 하기도 안 하기도 애매한 날도 있다. 5월이 시작되자마자 거짓말처럼 건기가 끝나고 우기로 접어들었다. 배추 수확이 시작되는 5월 중순께는 초순보다 잦게 내리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굵은 빗줄기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땐 일꾼들이 배추밭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 바람에 작업 일수가 늘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며 애매하게 비가 내리는 경우는 보통 작업을 시작하고, 일하다가 예상치 못하게 빗줄기가 굵어지더라도 웬만해선 철수하는 법이 없었다. 작업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배추작업반들의 숙식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벽녘까지 머리에 랜턴을 쓴 채 비를 맞고 작업을 해야 할 때도 잦은 것 같았다.


  애매한 날씨에 작업을 나갔다가 밤새 비를 맞고 들어오는 배추작업반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느낄 피로의 무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비와 땀이 함께 젖어 든 옷이 온몸으로 감겨들 때의 느낌과 진행 속도를 맞추기 위해 기계처럼 움직여야 하는 극한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곤 했다. 동이 틀 때까지도 야속한 비는 그치지 않고, 질척해진 흙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물먹은 작업화가 묵직하게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도……. 젖은 몸으로 들어서는 노동자들을 바라보며, 맑은 날의 작업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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