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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Jun 23. 2023

한국 사회에서 배려가 부족한 이유

양보보다는 배려가 먼저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굳이 두 종류로 분류한다면, 하나는 타인을 위해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배려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



한국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만한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다. 가끔 해외에 나가보면 높아진 한국의 위상과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이 얼마나 우호적인지 실감할 수 있다.


반면에, 감추고 싶은 단점들도 적지 않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양보와 배려의 부족이다.

우리와 경제 규모가 비슷한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소득 수준이 우리보다 낮은 국가들과 비교에서도 더 못한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잘 먹고 잘 꾸며서 덩치는 크고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양보와 배려의 결핍으로 마음은 메말라가고 사회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양보와 배려의 문화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랜 기간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내 나름의 분석으로는 '과잉과 과밀'이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구과잉은 도시 지역에 심각한 과밀현상을 불러왔고, 이어서 치열한 경쟁을 일으켰다. 경쟁이 과열되면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고, 순서를 지키지 않으려는 꼼수와 불공정이 생겨난다. 법과 규칙조차 무시당하는 마당에 양보와 배려의 미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  만무하다.


양보와 배려에 대한 고정관념 또한 이 두 가지 미덕이 문화로 정착하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단체나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하는 특별한 행위로 여기다 보니, 양보와 배려의 개념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불우이웃 돕기' 등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양보와 배려는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그릇된 인식이 생겨난다.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에게,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만 외치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약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양보와 배려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베풀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람들은 늘 최상위 계층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는 버릇 있다. 흑수저, 가난한 서민, 심지어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패한 인생이라며 스스로를 비하한다. '내 주제에 무슨, 먹고살기도 바쁜데..' 다들 약자 흉내를 내거나 자신보다 못한 약자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몸을 잔뜩 낮추고 있다.


 

한 사회의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산을 옮기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일 이상으로 어려운 과제다. 그렇다고 전통사회의 위계질서를 부활시켜 예의범절을 강요할 수는 없다. 법과 규칙을 강화하는 것 또한 자발성만 떨어뜨릴 뿐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과잉(과밀)과 과도한 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새로운 문화가 뿌리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비판하고 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작지만 실행으로 옮길 수 있도록 서로에게 출구를 열어 주어야 한다.


먼저 양보와 배려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보의 개념은 물질, 권리, 주장 등을 타인을 위해 양도하거나 포기하는 행위다. 이에 반해, 배려는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 유무형의 혜택을 주는 행위로 손해나 희생이 없어도 얼마든지 타인을 이롭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양보와 배려의 경계가 모호하고 상황에 따라 전달하는 의미가 뒤섞여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선착순으로 경품을 나눠주는 행사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어떤 사람이 바로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순서를 바꿔 주려고 한다. 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선착순이어서 경품이 모자랄 수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경품 수량이 넉넉해 대기줄 뒤에 있는 사람까지 지급이 보장된 경우다.

첫 번째는 베푸는 자의 손해와 희생이 발생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조금 늦게 받는 것일 뿐, 실질적인 손해나 희생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위의 사례에서 첫 번째를 양보라 하고, 두 번째를 배려하고 해 보자. 양보와 배려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하게 되면 '양보하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배려의 영역까지 전이가 되어 '배려하면 나만 손해'가 되어 버린다. 배려는 내가 가진 하나가 사라져야 상대에게 하나를 줄 수 있는 제로섬 게임 법칙 같은 양보와는 차원이 다르다.


양보의 범주에 애매하게 편입되어 있는 배려를 떼어내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아직 성숙 단계에 진입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손해의 느낌이 강한 양보를 권장하기에는 시기상조일 것이다. 부담스러운 양보보다는 당장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 배려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배려는 크기와 무게를 따지지 않는다. 지난번에 내가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당신이 양보할 차례라는 식의 조건이 붙지도 않는다. 양보만큼 즉각적으로 표시가 나지는 않지만, 보일 듯 말듯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감싸주는 따뜻함과 자비심, 한 발 앞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아량과 이해심이 내포되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배려가 사라진 험악한 세상에서 받게 될 폐해는 고스란히 나와 나의 가족한테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그 반대로 타인을 향한 배려의 최종 수혜자 또한 나와 나의 가족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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