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를 위해 차려입었다.

잊고 있던 나를 데리러 가는 길

by 담서제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이 텅 빈 듯 고요했다. 샴푸를 손바닥에 듬뿍 따라 머리카락 사이로 밀어 넣었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은 따뜻했다.


빡빡 문지르는 동안 거품이 하얗게 부풀어 올랐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낯설었다. 갑자기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잠옷 차림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던 새벽이 아니라, 나를 위해 차려입은 하루를 살고 싶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해. 이런 마음이 든 건 오랜만이었다.


옷장을 열었다. 베이지색 롱치마, 검정 티, 검정 패딩. 색이 조용한 옷들. 베이지와 짙은 갈색이 어우러진 머플러는 오늘따라 더 따뜻해 보였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펼쳐놓고 화장을 했다.


선크림을 바르고 입술에 색을 얹는 단출한 화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해.' 거울 속에서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금빛 동그란 귀걸이까지 하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새벽은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그 틈을 파고 들어온 아침이 천천히 내 자리에 내려앉고 있었다. 아침빛이 방 한가득 스며들자 마음 한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도네온으로 연주한 피아졸라의 '망각'을 틀었다. 음악은 아르헨티나의 골목길을 불러왔다. 갑자기 비에 젖은 돌길 위로 붉은빛이 번지는 듯했고, '화양연화' 속 비 내리던 조용한 복도와 노란 조명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나를 탱고로 이끌었을까. 바람이 아니라, 오래전 묻어두었던 나의 어떤 부분이 손을 흔든 건 아닐까.


반도네온의 울림은 잔잔한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목에 두른 머플러 속으로 뜨거운 열기가 스며들었다. 음악은 끝이 났지만 여운은 여전히 남아 나를 두드렸다. 내친김에 '화양연화'의 OST를 틀었다.


문득,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이 피던 순간은 언제였고, 지던 계절은 또 언제였을까?


모든 것이 불투명하던 시절이 있었다. 눈을 감고 뜨는 그 순간순간이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의 몸과 마음을 조종하는 것 같던 때. 무엇을 해도 내가 보이지 않던 시절. 내가 기대어 설 곳을 찾지 못해 흔들리던 날들.


그때의 나는 무엇으로 버티며 살았을까?. 삶은 흘러가는 것이라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조차 몰랐다. 내가 붙잡아야만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움켜쥔 손 때문에 더 많이 아팠다.


음악은 그 시절 나를 데리고 와 내 앞에 세웠다. 칙칙하고 어둡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 방글방글 웃으며 '괜찮아, 난 잘하고 있어'라고 말하던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지금은 어때?”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좋다. 좋아. 이제는 너무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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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내뱉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훈훈한 미풍이 불었다. 나는 짐을 챙기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새벽부터 차려입은 이 옷 그대로, 어디든 가 보고 싶었다.


미플러스 동생들과 함께 겨울을 준비했다. 동생들은 옷을, 나는 장갑을 샀다. 점심에는 따끈한 갈치조림을 먹고, 주황빛 감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한적한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갤러리 겸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겨울의 맑은 하늘이 나를 꺼내 양지바른 볕에 널어놓았다. 내 안에 들어 있는 나의 결이 빛과 함께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삶은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나를 다시 만나러 떠나는 작은 용기에서 빛난다'. 는 것을


<깨달음 한 줄>

삶은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나를 다시 만나러 떠나는 작은 용기에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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