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산책 연습』
『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문학동네, 2021
과거는 어떻게 과거로만 남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은 계속 흐르고 과거는 멀어지고 우리는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억은 그저 점점 아득해지는 과거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래 산책 연습』에서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서 과거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과거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분명 기억이지만, 이 기억은 과거의 특정 시점이 아니라 과거에서 바라보는 미래를 향해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미래 산책 연습』은 부산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다루는데, 소설에서 ‘나’는 82년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당사자들이 80년 5월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억한다고 짐작한다. 82년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당사자들은 80년 5월의 광주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 진상을 전해 들어 알고 있다. 그들은 광주 사람들이 희구(希求)했을 미래를 함께 바라보고 함께 믿는다. 그러면서 그 희구의 시간을, 80년 5월 광주의 사람들이 바랐을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어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 반복”하는 방식으로 광주를 기억한다.
또한 ‘나’는 “82년 미문화원에 불을 붙인 이들은 79년 부산 거리거리를 뛰어다니며 소리 높여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외쳤을 것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조갑상의 소설 『밤의 눈』에 나오는 옥구열이라는 인물이 떠올랐다. 옥구열은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 학살로 아버지를 잃었고 이후 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유족회를 결성했다가 박정희 정권에서 박해를 당하며 감시 아래 살아간다. 부산에 살고 있던 옥구열은 79년에 부마항쟁을 목격하고 그 대열에 합류해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함께 외친다. 옥구열이 기대고 있는 현실의 인물은 실제 한국전쟁 과거청산 운동에 힘쓰기도 했다.
이처럼 82년과 80년, 79년이라는 시간들은 60년, 50년 뿐만 아니라 지금과도 닿아 있다. 와야 할 미래를 선취해 살아왔을 과거의 사람들, 그들이 살아내었을 과거의 시간을 미래에서도 반복할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과거는 그저 과거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시간에서 계속 겹쳐지고 반복되며 함께 흘러가는 시간인 것이다.
『미래 산책 연습』은 두 인물, ‘나’와 ‘수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은 종종 다른 삶을 꿈꾸고 상상한다. 거리를 거닐고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며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의 삶을 스스로의 삶과 포개어 보거나 아예 그들의 시점이 되어 살아보기도 하고, 아예 먼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상상하기도 한다. 다른 삶을 상상하는 것은 때로 지금 여기의 삶에서 도피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미래 산책 연습』은 다른 삶을 상상해보는 것이 아직 오지 않은(未來) 삶의 시간과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연습을 통해” 사는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이 이러한 연습을 뭔가 비장한 것으로만 말하고 있지는 않다.
소설에는 부산 구도심의 곳곳을 산책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지금은 근대역사관이 된 부산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당사자가 다녔던 영도의 성당, 아파트나 백화점 같은 오래된 건물들과 좁은 골목…… 산책은 딱히 뚜렷한 목적이나 결심 없이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 산책 연습』을 읽는다는 것은 정처없는 산책의 여정을 터벅터벅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산책길을 함께 걷다 보면 과거의 사람들이 걸었을 길과 그 길 위에서 그들이 그렸을 미래가 아른거린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또 다른 여정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