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기르는 연회의 주최자이자, 황금 궁전의 주인으로서 이 어두운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에기르는 서둘러 음식과 술을 내올 것을 명령했다. 에기르에게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두 명의 집사가 있었다. 그들은 '피마펭(Fimafengr : 의미불명)'과 '엘디르(Eldir : 의미불명)' 라는 거인이었다. 피마펭은 음식과 가사 등의 집 안의 대소사를 담당했고, 엘디르는 경비와 안전 등의 집 밖의 대소사를 담당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손꼽히는 이들이었고, 에기르에게는 자랑과도 같은 집사들이었다.
에기르의 명령에 따라 음식과 술을 내온 것은 피마펭이었다. 피마펭은 이미 준비된 순서대로 음식과 술을 내왔는데, 그것들은 저절로 신들의 탁자로 날아와 내려앉았다. 음식이 비면 곧바로 새로운 음식으로 바뀌었고, 술잔이 비면 알아서 술이 채워졌다. 신기한 일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피마펭이 준비하여 내온 음식과 술, 음료는 각각의 손님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것들로 준비되었다. 음식의 종류와 온도, 맛에 이르기까지 신들과 요정들의 입맛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술은 신들이 좋아하는 맛과 향, 온도까지 맞추어 준비되었는데, 이를 맛본 신들은 저마다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신은 음식과 술을 맛보고는 자신의 이마를 치며 말했다.
[야, 이건 정말 대단하군! 나를 오랫동안 모신 시종들도 종종 틀리는데.. 에기르, 난 감탄했소. 당신네 집사 피마펭은 정말 대단한 하인이구료! 부럽소, 에기르. 저런 자를 데리고 있다니.]
[아, 과찬이십니다. 설마 아스가르드에 이 친구만한 시종이 없을라구요? 하하!]
에기르는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에기르는 가만히 오딘과 프리그를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오딘과 프리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불쾌감을 느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딘과 프리그의 표정도 많이 편안해보였다. 이토록 신들의 세심한 취향을 하나하나 짚어내 그들의 기분을 맞춘 것은 피마펭의 남다른 섬세함 덕분이었다. 이런 피마펭의 활약 덕분에 어둡던 연회의 분위기는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신들의 표정도 풀리고, 조금씩 웃음소리도 나기 시작했다. 신들은 돌아가며 에기르의 집사인 피마펭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보게, 피마펭. 대체 이건 어떻게 만든건가? 내 시종을 데려와 배워가게 해야했어!]
[캬아~! 술잔 온도, 이거 너무 좋은데? 거기다 술잔에 새겨진 건 내가 좋아하는 고래무늬가 아닌가? 하하! 고맙네, 피마펭!]
[이봐, 피마펭! 혹시 이걸로 한 잔 더 안될까?]
[피마펭~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어? 말만 해! 내가 다 구해다 줄테니! 하하!]
신들도 요정들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피마펭을 칭찬했다. 이에 에기르와 란의 어깨도 활짝 펴졌다. 특히 칭찬을 받는 피마펭도 기분이 좋아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다. 이제껏 연회에서 이렇게 칭찬을 받은 시종은 그 누구도 없었을 것이다. 피마펭은 신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과찬이십니다. 많이 모자른데, 이토록 칭찬을 해주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그런 피마펭을 겸손하다며, 더욱 칭찬했는데.. 오직 한 신만이 이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바로 남이 잘되는 건 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로키였다. 피마펭은 예정에 없던 로키가 들이닥쳤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추가로 로키를 위한 음식과 술을 준비했다. 당연히 그가 준비한 음식이 로키의 입에도 잘 맞았을 것이다. 그래서 로키는 더욱 짜증이 났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자신에게 맞는 음식과 술을 대령하는 피마펭이, 이런 능력을 가진 그가 짜증났다. 더욱이 로키에게 지금 이 자리는 내색은 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지만 바늘방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이 하찮은 하인놈 하나를 띄워주는 꼴을 보고 있자니 로키는 뱃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여기에 피마펭이 겸손하게 응대하는 모습마저도 로키에게는 속이 훤히 보이는 여우짓 같아 보였다.
[(하아.. 어디가나 저런 잡것이 있네? 아, 눈꼴 시려..)]
로키는 애꿎은 술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술만 계속 들이키다보니 어지간한 로키도 슬슬 취기가 올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피마펭에 대한 신들의 칭찬이 이어졌는데, 이 모습이 로키는 너무도 꼴보기 싫었다. 세상의 모든 관심은 자신이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로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모든 이들에게 눈총을 받는데 비해, 저 천박한 하인 놈이 뭘 잘했다고 모든 관심과 칭찬을 받고 있다는 말인가? 이에 로키의 뱃속에서부터 화가 끓어올랐다.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한 로키가 '쾅'소리를 내며 거칠게 탁자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모두가 놀라 로키를 쳐다보았는데, 로키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피마펭을 불렀다.
순간 로키는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고, 허리춤에 차고있던 단검을 빼어 그대로 피마펭의 목을 그어버렸다. 피마펭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올랐고, 피마펭은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채 그대로 쓰러져 죽어버리고 말았다.
[아, 짜증나니까! 쳐웃지말라고~!]
피마펭의 피를 뒤집어 쓴 로키는 쓰러진 피마펭에게로 자신의 단검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로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연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다 이내 폭죽이 터져나오듯,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주인인 에기르도, 초대를 받은 신들도 로키의 행동을 도저히 봐줄수 없었다. 신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야!]
[로키! 지금 제정신인가?!]
그중 가장 분노한 것은 집주인이자 피마펭의 주인인 에기르였다. 신들의 고함과 함께 갑자기 주변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바다의 주인인 에기르의 분노로 그때까지 고요하던 바다의 심연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에기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로키! 네 놈이 감히 내 하인을 죽여?! 신들의 아량으로 네 놈을 손님으로 받아주었거늘, 감히!!]
[야.. 너무들 하네. 겨우 하인 놈 하나 혼냈기로서니.]
역시 로키다운 언행이었다. 이에 에기르는 더욱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자리에서 로키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이곳은 그의 궁전이었고, 그는 그럴만한 명분도, 그럴만한 힘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는 바다의 주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자였기에 냉정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는 신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고, 로키가 죄를 저지른 것은 맞지만 어쨌건 그도 신의 반열에 오른 자였다. 에기르는 가까스로 화를 참으며 소리쳤다.
[로키!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너에 대한 처분은 잠시 미룰 것이다. 허나! 내 반드시 이번 일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아무도 없느냐?! 당장 저 자를 궁전 밖으로 쫓아내라!!]
손님으로 온 신들을 생각해 에기르로서는 너무나도 관대한 결정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로키는 이것도 불만이었다. 엘디르를 비롯한 경비를 서던 자들이 달려들어 로키의 양 팔을 붙들었는데, 로키는 이를 뿌리치려는 듯 팔을 허우적 거리며 소리쳤다.
[아~ 왜!? 왜 또 나만 가지고 그래!! 야, 에기르! 이봐, 오딘! 뭐라고 좀 해봐!]
로키가 되려 화를 내며 맞섰지만 황금 궁전 안 그 누구도 로키의 말에 동의하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젊은 신들은 자신들의 방패를 꺼내들고 로키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로키가 저항하자, 그들은 방패를 들고 로키에게로 다가갔다. 칼을 꺼내들지 않은 것이 다행인 일이었음에도 로키는 그런 젊은 신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너 누구한테 방패를 들이미는거야! 엉? 내가 네 아비랑 친구인걸 몰라! 너 방패 안내려? 이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한참을 버티며 소란을 피우던 로키였지만, 결국 엘디르와 그의 부하들에게 이끌려 궁전 밖으로 끌려나갔다. 로키를 황금 궁전의 문 밖으로 쫓아낸 엘디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