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무렵, 고등학생인 큰 딸이 울면서 전화를 했다.
이과생이지만 수학이 늘 힘든 아이라 스트레스가 많은데, 심화반 보충수업에서 잘하는 친구들을 보며 갑자기 마음이 무너져버린 모양이었다.
죽고 싶다는 말까지 흘리며, 이 성적 때문에 원하는 대학이나 전공을 못 갈 것 같고, 더 나아가 앞으로의 인생이 끝없이 추락할 것 같다고 두려움을 토로했다.
"수학때문에 죽긴 왜 죽어. 그깟 수학이 니 인생 어떻게 하지 못해."
나로서는 다독이는 말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아무 위로도 안심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는 지금 자신의 인생에서 수학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지고 있었고, 앞으로 살아가며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마다 어떻게 넘을 수 있을지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집어 삼킬 것 같은 절망을 닮은 공포마저 느끼고 있는 아이에게 부모로서 정답도 위안도 주기가 어렵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했다.
그날 밤에는 중학생 작은 딸이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전교회장에 출마해 열심히 선거운동 중에 있는데, 상대 후보가 될 뻔 했던 아이가 왜곡된 소문을 퍼뜨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울먹였다.
야심차게 준비한 선거 운동에 차질이 생긴 것도 너무 속상한데 억울한 소문까지 접하게 되니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가 크다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큰 딸 일로 마음이 무겁던 탓에, 작은 아이의 감정보다 먼저 “원래 계획대로 되는 건 없어. 플랜B도 있어야지.”라는 말부터 내뱉어 버렸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인데 울면 뭐 하니”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말은 작은 아이의 아픔을 더 깊이 흔들어 놓았고, 결국 아이는 "힘든데 우는 것도 맘대로 못해?"라며 엉엉 울고 말았다.
그 순간 바로 알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순서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먼저 아이의 마음을 공감하고 안아줬어야 했다.
힘들어하는 아이에게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로 상처만 더 헤집어 놓은 셈이었다.
나는 원래 굉장한 공감형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흡수해 나까지 병이 다 날 지경이였는데, 부모가 된 이후로는 나도 모르게 문제 해결부터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내게 자신의 문제나 감정을 솔직하게 먼저 말해주는 것이 고맙고 소중하면서도, 정작 가장 먼저 그 감정을 받아주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부모라고해서 항상 정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다.
먼저 살아본 인생 선배라고 해서 늘 현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럴 때 어떤 말이 아이에게 힘이 되고, 어떤 행동이 도움이 될지 참 어렵다.
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한 것 역시 두번째가 된다.
어리다고 해서 그 삶의 무게가 어른의 그것보다 가볍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큰 장벽이 되는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어려움의 경중을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 딸들도 나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전사(戰士)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싸우고 버티고 있다.
넘어지고 다치고 상처가 남더라도 살아남고 버티는 것이 결국은 승리일 것이다.
늦은 밤, 두 딸에게 각각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내가 먼저 공감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와 엄마지만 확실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
그리고 너희는 잘 하고 있고 스스로를 더 믿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위로와 격려, 실질적인 조언까지 담았다.
두 아이 모두 고맙다는 답을 보내왔다.
오늘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떤 일과를 보냈을지 모르겠다.
부디 어제보다는 마음의 풍랑이 가라앉은 하루였기를.
이 시간이 쌓여 그들의 인생에 결국에 단단한 기념비가 세워지기를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