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향해 달려가 기어코 만나는 영화
한 문학평론가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이 간단한 리뷰는 '비판'이 아닌 '매혹'에 기반한 것이다. 따라서, 친절하게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글이 아니라 전체성과 균형이라는 미덕을 희생하더라도 개인적으로 특별히 매혹되었던 영화의 특징으로 곧장 내달려가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이 글을 쓸 때 나는 그저 <샤인>(1996)에 대한 매혹을 학교문집으로 옮긴 소년, 아마추어일 뿐이다.
영화 초반부에 이미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 등장한다. 또한, 영화의 중간 중간 영화의 주제를 친절히 알려주는 듯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위의 캡쳐 이미지는 그 몇 장면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서로를 향해서 달려가는 영화, 기어코 만나는 영화'이다. 축자적으로도, 은유적으로도 그러하다.
제목 '리코리쉬 피자'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이미 많은 곳에서 이에 대한 정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영화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도시 엔시아에서 벌어지는 열 살 차이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스물 다섯과 열 다섯. 이야기의 전개 조건 자체에서 풍기는 전형성은 각본과 연출의 특별함으로, 감독의 특별한 시선으로 어떠한 다른 영화도 잘 떠오르지 않는 서사가 된다. 감독은 유사한 장르의 이전 영화인 <펀치 드렁크 러브>(2002)에서도 이미 그런 솜씨를 증명한 바 있지만 말이다.
늘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영화는 기술적 진보, 이야기의 희소성, 연기의 탁월성, 연출의 비범함, 형식의 혁신성, 음악의 적합성 등으로 뒷받침되곤 한다는 걸 우리는 상식처럼 알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반쯤은 농담으로,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구성요소 중 단지 한 가지만 월등히 좋아도 영화 전체가 좋아진다는 지론을 펴기도 했다. 단순하고 평이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연출과 연기의 창조적인 전개가 빚어낸 놀라운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는 단순히 각본이 탄탄하고, 이야기를 함께 끌고 가는 당대의 시대 공기를 반영하는 듯한 음악들이 하나의 시나리오처럼 유려한 리듬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이야기 전체에서 뻗어나오는 인물, 사건, 배경에 있어서의 지극한 현실성(그러므로 이는 궁극적으로 그 어떤 다른 인물, 다른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지 않는 효과를 불러온다)과 지극한 구체성(폴 토머스 앤더슨은 다른 영화에서도 이 지역을 배경으로 삼곤 했고, 여자 주인공은 쉽게 볼 순 없지만 인생에 한번쯤은 마추쳤을 법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이 전체 이야기 구조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과 엮이며 파생되는 특정한 에피소드들을 살아움직이게 한다.(바로 이 점은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을 존경한 <벌새>의 김보라 감독 또한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숀펜, 브래들리 쿠퍼 등이 등장하는 씬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영화관을 나오는 내게 이 영화가 화인(火印)처럼 남긴 것은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이다. 고도로 지적인 인물이나 조금은 모자란 인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인물 등을 연기할 때, 캐릭터 자체의 소수자성은 외려 연기에 있어서 특정한 전형성에 빠지게 하는 굴레로 작동하곤 한다. 다시 말해, '열연'이라 통칭되는 바로 그 블랙홀로 연기를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본 영화의 여자 주인공은 '평범한 인물' 범주가 숨기고 있는 특유의 입체성으로 인해 연출과 연기 모든 면에서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이유를 통한 납득만으로 그려질 수 없는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성의 논리가 아닌 감성의 논리로 영화의 시간을 지배하고야 마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고 있으며, 연기를 하는 알라나 하임 역시 합리적인 이유를 통해 인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연기를 하기보다는 인물의 감성 상태, 더 나아가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감각적 상태에 집중하면서 다른 인물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연기자의 신체적 구성 물질을 온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변화일지도 모른다. 능동적인 인식과 주체적인 구성을 통해 하나의 인물로 나아간다기보다는 열려진 반응과 상호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연기의 전체 흐름 속에 자연스레 하나가 됨으로써 자의식이 사라지는 연기의 단계 말이다.
이는 마치 훌륭한 재즈 연주자가 종종 범접하기 힘든 연주를 마친 소감을 말할 때와 유사하다. 연기가 앙상블이면서도 하나의 '흐름'인 것처럼 재즈 연주 또한 그러한다. 때론, 연주자들은 능동적으로 액팅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에서 현재 연주가 나아가야 할 보이지 않는 길을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발견하게 되고 '자연스런' 흐름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완전히 잊고 말이다. 자의식과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이야기의 흐름과 완전하게 결합된 어떤 인물이 출현하는 것이다. 밴드의 멤버인 알라나 하임의 첫 연기가 이런 경지라면 그는 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바로 '흐름' 속의 자신을 이미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연주와 연기를 공히 지배하는 감성적 이해력으로 말이다. 훌륭한 연기란 늘 의식와 논리의 경계 밖에서 설득하는 섬광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