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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를말하는사람 May 24. 2022

결혼, 그 쓸쓸함의 기록 10

꿈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일


다시 잠들면서 ‘내가 눈을 뜨면 이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그를 만나기 전으로 타임슬립이 되어있을 거야’라고 생각하자 그 잠결에도 내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일은 꿈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상태가 정말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병리적 현상인 것인지 내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상태를 알아차린 이상, 나는 남편의 말대로 이혼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남편은 협의 이혼을 해야 하니, 협의 사항을 가져와서 자기에게 보여달라고 했다. 본인이 이혼을 하고 싶어 했으면서 이런 시간이 들어가고 노력이 들어가는 일은 손도 안 대고 해오라는 말에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그는 이혼절차나 필요한 건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이혼할 테니 내놓으라는 식이라,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내가 하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또 누가 뭘 해야 되니를 가지고 싸우다가 잘난 체 한다는 둥의 막말을 듣기가 싫었다.


협의 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에 대해서 양쪽이 모두 협의가 되어야 한다.

1. 친권/양육권, 2. 양육비, 3. 재산 분할 4.(필요한 상황이라면) 위자료


나는 보고가 코앞으로 다가와 일도 급하게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업무를 미루고 내가 어떻게 정해야 원만하게 이혼할 수 있을지 합리적인 방안을 짜기 시작했다.


합리적이란 의미는 내가 제시했을 때, 상대방이 반박하지 않을 만한 명확한 근거가 있어서 논란의 소지를 만들지 않을 방안이란 뜻이다.


친권은 양쪽 모두, 양육권은 내가 가지는 것으로 하였다. 양육권을 정할 때 주 양육자가 아닌 사람이 심각한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이혼하는 남편이 싫다고 해서 무조건 못 보게 할 수 없다.

(폭언을 했을지언정) 아빠 본인이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교섭권을 줘야 하는데 어떻게 교섭할지도 상세히 정해야 한다. 내가 주로 양육을 하고 주중 한번, 주말 한번, 아빠가 씻기고 재우는 것까지 하기로 정했다.

(이때 교섭할 장소와 시간, 인도하는 방식까지 정해야 한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지금도 아빠가 그 정도 시간을 아이와 보내기 때문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했다.


이혼하면 뭔가 크게 해방되거나 내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혼한다고 달라지진 않네. 란 생각이 들었다.


양육비 부분은 훨씬 고민할 거리가 적었다. 양육비의 경우 현재 기준으로 아이에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의 반을 각각 부담하기로 하고, 미래에 새롭게 아이에게 그때그때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는 주양육자인 내가 증빙하고 반을 지급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들어가는 식비, 의복, 생활비등에 대해서는 내가 쓰는 비용의 1/3을 상대가 줘야 할 양육비로 책정했다.

현재로서는 등/하원 이모님 비용이 있어월 280만 원가량의 양육비를 남편이 부담해야 했다.

(이모님 비용이 차차 없어지겠지만, 커가면서 교육비용은 아이의 진로에 따라 더 들 수도 있기에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적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은 어쩌면 이혼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현재 남편이 지출하는 돈이래봤자 이 집을 사며 빌린 돈의 몇천만 원 되는 금액의 대출 이자, 차 할부금, 그리고 본인 저녁용으로 쿠팡을 시키거나 배달시켜먹는 비용 정도 이기 때문이다.

주담대 원금, 집 사면서 내 명의로 빌린 억 단위의 신용대출 이자, 매달 나가는 공과금, 수도세 전기세, 아이 교육비, 이모님 비용, 전반적인 식비와 생활용품은 내 월급에서 지출되고 있다.

지금이야 싸울까 봐 얘기 못한 돈을 달란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정해지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부가적인 비용 지출에 대해 짧으면 월 단위로 이러저러한 사정들을 얘기하고, 연락을 해야 할 것이고, 그때마다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지금도 남편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대화를 하면, 싸울 거리도 아닌 일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할 것이고, 나의 수치심을 건드리는 모욕적인 말들을 할 것인데, 이혼하고 나서도 그걸 겪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났다. 이렇게 힘들게 이혼하고 갈라섰는데 나를 괴롭히는 것은 여전히 그대로라니…


이래저래 또 싸우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돈이 들어가더라도 말하지 못할 것이고, 그냥 내가 몫이 되어 아이의 교육환경이 현저히 안 좋아지거나, 내가 경제적으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양육권과 양육비를 나누는 건 어렵지 않은 문제였지만, 이 이혼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줄 것인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내 주변에 머물러야 하는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은 바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실에 창가에 직각으로 놓여있는 6인용 식탁의 끝까지 들어오던 햇볕은 어느새 꼬리가 짧아져 있었다.

창밖을 봐도 눈이 부시지 않는 걸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인가 보다 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커피만 한잔 내려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양육비를 좀 더 정리하고 싶지만, 오후부터는 보고서를 써야만 했다.


보고 받을 임원들 일정이 정해져 있는데 내가 이혼 준비한다고 바꿀 순 없었다. 1차 보고자에게 잡힌 리뷰는 3시였다.

1시간 만에 초안을 만들고 리뷰를 받고, 오후 내내 실무자들과의 미팅을 진행했다.


일이 아주 많아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일 지도 몰랐다.

허겁지겁 회의를 마무리하고, 아이를 하원 시키고,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잠자리 책을 펼쳤을 때, 하루 종일 마음 밑바닥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슬픔 이들이 갑자기 각성한 듯 서로서로 자기가 한 마디씩 하겠다며 손을 들어대는 거 같았다.


책에서 아이들은 방학 동안 오이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피클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오이가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재판이 열렸다.


난 미생물을 찾아 나서는 과학 만화를 읽으며 울먹거렸다. 울지 않으려고 침을 삼키고, 헛기침을 하고, 큰 숨을 쉬어보면서 읽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둑이 오이를 훔쳐 간 거예요. 정확히는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요”


결국 문장을 다 읽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다. 콧물에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우는 나를 보고 아이는 처음엔 매우 놀라더니 곧이어 아이의 눈과 입꼬리가 내려갔다. “엄마 울지 마” 하고 따라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미안해”

내가 힘들고 슬픈 이 상황에서도 자기 선택으로 나온 것이 아닌 이 아이에겐 그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7살의 아이는 나의 머리를 꼭 감싸고 토닥토닥해주었다. 토닥거리던 아이의 손이 느려지더니 어느새 멈췄던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어떤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혼식을 가야 하는데 늦은 것이다. 남편과의 결혼식이었는데 나와 어느 다른 여자와 같이 결혼을 하는 합동결혼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상한 결혼식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은 하지 못하고, 늦었다고 남편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부모님에게 엄청나게 모욕적인 말을 할 것 같아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조급한 마음뿐이었다.


결혼식장에 도착하자 나와 남편과 같이 결혼하는 그 여자는 결혼식에서 노래를 뽐내고 싶어 했는데, 신부대기실에서 그 여자는 나에게도 노래를 이렇게 해야 하는데 내가 못한다며 핀잔을 줬다.


모욕감은 둘째치고 결혼 후 저 여자랑 생활을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부터 하는 중, 방문이 열리고 남편이 방문을 열고 옷장에서 속옷을 가지고 가는 소리에 눈을 떴다.


꿈이었다. 꿈이어서 다행이랄 것도 없는 꿈.


다시 잠들면서 ‘내가 눈을 뜨면 이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그를 만나기 전으로 타임슬립이 되어있을 거야’라고 생각하자 그 잠결에도 내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일은 꿈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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