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고 관계에 좌절하다
퇴근 후, 태권도장에 들러야 했다.
아들이 외투를 깜빡 잊고 태권도장에 두고 온 터였다. 관장님께 전화로 옷을 설명했지만, 혹시 다른 아이가 두고 간 옷을 잘못 가져올까 봐 결국 내가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별로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버스에 올라 의자에 몸을 맡기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에 눈이 절로 감겼다. ‘조금만 눈을 붙여야지’라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기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얼마나 흘렀을까, 버스가 덜컹거리며 멈추는 바람에 놀라 눈을 떴다. 잠시 멍한 머리로 창밖을 훑으며 내가 어디쯤 왔는지 가늠했다. 다행히 아직 내릴 정류장까지는 조금 남아 있었다. ‘조금 더 자도 될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정류장을 지나칠 것 같아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오늘 뭐 했다고 이렇게 피곤하지…’
태권도장에 도착해 어제 두고 간 외투를 찾았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쯤 입었던 가을 외투도 한 켠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두 벌의 외투를 가방에 욱여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가 자꾸 물건을 잃어버려.”
내가 한숨을 섞어 얘기하자,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건 너 닮아서 그래.”
그 말에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 나는 어릴 적부터 온갖 물건을 잃어버려 엄마에게 매일같이 혼이 나곤 했다. 신발주머니와 실내화는 얼마나 자주 새로 샀는지 모른다. 비가 오던 아침에 챙겨 나간 우산은 하교할 땐 반드시 어디론가 사라졌고, 지갑, 물통, 모자, 필통 등 내 손을 거쳐 간 것들은 종종 종적을 감추었다.
내 아들도 다를 게 없었다. 필통이며 물통을 교실에 두고 오기가 일쑤였고, 금요일마다 가져와야 할 신발주머니는 한 달에 한 번 가져오면 다행이었다. 매번 틀린 문제를 다시 써야 하는 숙제가 있는데도 시험지를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 독서록 책도 사물함에 그대로 둔 채 빈 종이에 글을 써 붙이길 반복해 원래 책 두께의 두 배가 되어 버렸다. 학교가 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어야 집에 도착하는 나로선, 아들과 함께 다시 학교에 들어가 물건을 찾으러 다닐 여유도 없었다. 설령 시간이 나더라도 출입증을 미리 신청해야 하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아이를 몰아세우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어떻게든 아이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웃긴 이야기지만, 아들은 나와 같은 DNA를 나눠 가졌으니 내가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그 마음이 절로 끌렸다.
아이를 다그치다 보면 어느새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가도, 이내 아이가 측은해져서 그 감정이 쳇바퀴처럼 반복되었다.
내가 어릴 적 엄마에게 혼나며 느꼈던 당혹스러움이, 이 아이의 눈 속에서 거울처럼 비칠 때가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이 아이를 통해 적나라하게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느끼는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었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시절 나는 숙제를 빠짐없이 해갔고, 시험에서 늘 1등을 차지했다. 어쩌면 그것은 가정주부로서 살던 엄마가 나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던 열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빠는 생산직 노동자였고, 그 당시 공장 가까운 사택에 살았기에 학원을 다니기 어려웠다. 엄마는 집에서 나를 직접 예습시켰고, 덕분에 학교 수업은 늘 시시하게 느껴졌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출판사별 문제집을 잔뜩 사다 놓고 밤늦게까지 풀었다. 선생님들은 그 문제집에서 문제를 골라 시험을 내던 시절이라, 그 방식은 적어도 성적 면에서는 통했다.
엄마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었다. 집안의 모든 시간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차려주는 간식을 먹고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면 저녁이 준비된 따뜻한 집이 있었다. 이제 와서야 나는 그것을 **‘누렸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는 그걸 해주지 못하고 있다.
나와 똑같은 결점을 가진 아이.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인 나는 그 빈 곳을 채워줄 시간이 없다. 아이가 학교를 마칠 시간에 나는 회사에 있고, 아이는 방과 후 수업과 돌봄 교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태권도와 수영을 전전하며 하루를 보낸다.
아이는 늘 배고프다 말하지만, 가방에 간식 하나 넣어주고 스스로 챙겨 먹으라고 할 뿐이다. 집에 오면 아이는 학습지 영상을 보고 있지만, 그것이 맞는지 틀린 지 봐줄 여유가 없다. 나는 그저 그날 치운 것들을 정리하며 정신없이 움직일 뿐이다.
아이가 집중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는 화를 내고, 다시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걷다가 또 화를 낸다.
다른 아이들은 쉽게 해내는 일을, 이 아이는 번번이 놓친다. 그 모습이 나와 너무 닮아 있어 가슴이 쓰리지만, 나 또한 부족한 그 아이를 도울 힘이 없다.
3년을 기획했던 제품이 드디어 출시되었고, 곳곳에서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 출시에 맞춘 사진 촬영, 사내 방송 인터뷰, 고객 분석과 보고서 작성, 그리고 다음 제품 기획까지… 마치 갓난아기 돌보듯 잠을 설쳐가며 일했다.
하지만 애를 낳기만 하면 되나, 잘 키워야지… 임원들의 말은 마치 공허하게 울리는 북소리 같았다.
‘정작 내 아이는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는데요?’ 속으로 삼키던 말이 가슴을 꽉 조여 눈물 대신 숨이 가빠졌다.
양쪽을 다 잘할 수는 없다.
아이 문제라면 남편이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지난 9년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라 이제는 체념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내가 진정 선택해야 할 것은 커리어냐 육아냐가 아니다.
어쩌면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선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