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느닷없이 방향을 바꾼 바람이 내 얼굴을 강타하며 입안으로 무언가를 던져 넣었다. “카악 카악” ‘벌레? 그냥 먼진가? 나무 조각?’ 별별 상상을 다하며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헛구역질을 했지만, 목구멍 안쪽에 걸려 뱉어낼 수가 없었다. 따갑지 않은 걸로 봐서 상처가 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물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쪼그려 앉아 있던 순간에도 바람은 기준 없이 날뛰고 있었다.
수십 번의 시도 후 포기하고 일어섰다. 벌레였어도 이젠 어쩔 수 없다. 서서히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삼켜질 것 같다. 그게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뭐 어쩌겠어. 어처구니없지만 살펴보니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 가방을 챙겨 메고 다시 위를 향해 걸어갔다. 입은 다물었다. 거친 호흡을 코로 내뿜으며 한참을 걸어가다 길 가운데서 그냥 서버렸다. 그리고는 한 발을 들어 아스팔트 위를 쾅쾅 신경질적으로 굴렀다.
“일부러 그러신 거죠. 내가 자꾸 투덜거리니까. 조용히 입 다물고 걸으라고” 누가 봐도 시비조였다. “그렇다고 그만둘 거 같아요? 좀 투덜거리면 어때요. 원망 좀 하면 어때요. 어찌 됐든 지금 이렇게 걷고 있잖아요. 그러니 시끄러워도 좀 참으세요. 당신 탓이 아니지만 나도 이런 길을 원했던 건 아니거든요”
800 키로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의 시작 날이었다. 대장은 긴 긴 여정의 ‘대망의 첫날’이라 표현해 주었지만 나에게는 후회의 시작이었다. 산악인도 아니고 걷기를 실천하며 살지도 않던 내가 덜컥 도전을 예약한 것은, 어떤 사전 훈련도 없이 평소 해 오던 운동만 하면서 출국을 기다렸던 이유처럼 순례길이 드넓은 평원을 걷는 길이라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이제 와서야 실토한다.
출국 한 달 반 전 여행사의 설명회를 다녀온 후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여행사에서 나눠준 책자에 따르면 전체 일정 중 첫날이 가장 힘들 것이란다. 하물며 그 길이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이란다. 나폴레옹이 스페인 정복을 꿈꾸며 넘었다는 험난한 길. 하늘이 열어주지 않으면 결코 넘을 수 없다던 세계사에서 배운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며칠 밤을 걱정으로 지새웠다. 하지만 어쩌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혼자서 해내겠다고 덜컥 예약부터 해놓고는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한다면 가족들이 흉볼까 싶어 조금의 걱정과 우려도 내색하지 못하고 말없이 여행준비를 해야만 했다. 착잡하고 뒤숭숭했지만, 결국 나는 그 산맥을 걸었다.
초입부터 숨이 가빴다. 비포장의 험난한 산길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내려갈 줄 모르는 길이었다. 올라갔으면 조금은 내려갈 만도 한데 끝없는 오르막이었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갔고 내 뒤에도 수많은 순례자들의 행렬이 이어오고 있었다. 깊지 않은 경사지만 내리막이 없는 길은 큰 가방을 진 이에게도 무겁지 않은 가방을 멘 이에게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나는 내 탓이 심한 사람이었다. 결혼생활도, 친정 식구들과의 관계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좀 더 노력했었다면, 내가 좀 더 솔직했더라면, 내가 좀 더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엄마는 언니와 나를 누가 봐도 차별이라 느낄 정도로 다르게 대하셨다. 첫째와 둘째이면서 우리는 한 살 터울이었고, 자매 간의 소소한 다툼은 요즘 말로 ‘국룰’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엄마는 나의 사과만 요구하셨다. “언니가 잘못 한 건 맞아. 그래도 니가 동생이니까 니가 사과해야 하는 거야” 심지어 언니가 말없이 내 가방을 쓰고, 내 만년필을 가져갔다가 잃어버리고 와도 나는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우기셨다. 그래야 형제간에 우애가 생긴다는 논리로.
내내 찜찜하고 거북하게 살았다. 남들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관계가 아니라는 현실이 마치 나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져 자책하고, 또 이성적으로 따져 나의 노력 만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관계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행복의 기준에서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안다고 믿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들과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친구들. 그냥 ‘나는 친정 복은 없구나’ 인정하면 될 것을 지난 하게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내 탓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버려야만 내가 산다. 이 길의 끝까지 나를 몰아 부쳐 힘겹게 걸어 도착한 마지막에서 무엇이 채워지고 비워질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탓하는 버릇은 확실하게 두고 오리라. 그렇게 떠나온 여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닌 나폴레옹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는 말 듣기 싫죠? 근데 나도 정말 이런 길일줄 몰랐다고요. 솔직히 당신이랑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당신 이름이 있는 이 길을 내가 걸어야 하냐고요.”
“넘어가도록 허락해 줄 거면서 바람은 왜 이렇게 불어요? 이왕이면 좀 편안하게 걷게 해 줄 것이지 사람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불면 어떡해요?”
“산세는 왜 또 이래요? 눈앞의 언덕만 오르면 끝일 것처럼 기대하게 하다가 다시 새로운 봉우리를 숨겨 놓고. 지금 장난해요?” 불평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돌이켜보면 어이가 없으면서도 내가 주저 없이 말을 뱉었던 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 90% 이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뜻을 모르니 그저 고단함에 혼자 말을 하는구나 싶어 힘내라고 웃어주기까지 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그러다가 부지불식간에 바람이 내 입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도대체 이 오르막은 언제 끝나요?” 멈추지 않는 투정에 강제로 입을 다물게 했다고 확신한다.
한참 동안은 묵묵히 걸었다. 조용히 걷는 것도 그닥 나쁘지는 않았다. 터질 듯한 허벅지와 종아리의 통증이 조금 무뎌진 덕도 있었지만 힘든 중에도 스멀스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목구멍에 들어간 무언가가 도대체 무엇일까 걱정하다 보니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그런 방법으로 조용히 시켰을까 싶어 피식피식 웃었다. 더 이상의 원망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걸음이 가벼워지지도 않았고 목적지가 가까워지지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반복적으로 나 자신을 질책하던 하루하루는 내 등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고, 더는 후회하며 살고 싶지 않아 매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팽팽한 긴장감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힘든 길을 왜 걷고 있냐는 원망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나의 불평은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나폴레옹을 호출했다. 장장 8시간의 걸음 동안 속 편하게 대화할 이는 나폴레옹 밖에 없었다.
“당신은 이 길을 말을 타고 넘었겠죠? 당신의 부하들은 걸어서 넘었을 거고요.”
“근데 이렇게 험한 길인 줄 알고 갔던 거예요? 부하들 생각도 좀 했어야 했던 거 아니에요?”
나폴레옹 부하 걱정까지. 오지랖도 대단하다.
“정말 풍경이 그림 같이 예뻐요. 우리 애들이 제가 찍은 사진을 보고 늠름한 대장 같다네요. 오늘 바람이 심하게 부는 건 제가 용서해 줄게요”
“다들 여기 오는 이유가 본래의 자신을 찾고 싶어서라고 하던데, 저도 예전엔 안 이랬거든요. 삶이 고달파서 삐뚤어져 버린 거죠. 근데 나폴레옹 당신도 인생의 고단함은 좀 알지 않나요? 서로 이해합시다.”
프랑스 사람들이 나의 대화를 듣는다면 어떤 표정일지 문득 궁금하다. 미친 여자라고 하겠지?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듯 원망을 쏟아낸 덕분에 나는 내 탓을 하지 않고도 고단함을 견뎌내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 자초했든, 나폴레옹이 꿈속에서 광활한 풍경으로 나를 불렀든 피레네 언덕에서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과 힘겨운 여정을 함께하는 것은 내가 바라던 것이니까.
나는 ‘나폴레옹 길’을 이겨냈다. 그를 다시 불러내지도 않았다. 피레네에만 나폴레옹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틀 뒤 그 전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람만이 세차게 분 그날이 하늘이 허락해 준 날이라는 것을. 다음날 그 길을 시작한 이들은 험난한 비바람에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인정했다. 나폴레옹의 배려가 있었음을. 그의 배려는 위로가 필요했던 시끄러운 길동무,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